1670년(현종 11)
반계수록
규장각한국학연구원(서울대학교)
조선의 국가 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론을 담은 책으로, 1670년(현종 11)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이 저술했다. 1770년(영조 46) 영조의 명으로 경상도 감영에서 목판으로 간행하며 널리 알려졌다. 20세기에 들어와 실학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실학의 문을 연 책으로 주목받았고 저자인 유형원은 실학의 ‘비조(鼻祖)’로 평가되었다.
16세기 말의 임진왜란, 17세기 초의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며 조선은 국가적 위기에 빠졌다. 특히 여진족이 세운 청에게 군사적으로 굴복하고 신복(臣服)하기로 한 병자호란이 미친 충격은 엄청났다. 많은 사람들이 청에게 복수하고 외적의 침략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국가를 만들 수 있는 방안을 여러 형태로 고민했다. 유형원은 전면적인 개혁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그 설계안으로 『반계수록』을 지었다.
『반계수록』은 유형원이 할아버지의 3년 상을 지내던 31세 되던 해에 초안을 잡고 49세 때 완성했다. 경기도에 거주하던 중 집필을 시작했다가 전라도 부안으로 거처를 옮긴 후 마무리했으니, 20여 년이 걸린 긴 여정의 산물이다. 부안에는 오래전부터 소유하던 토지가 있고 또 할아버지가 지었던 집이 있어 경제적인 어려움은 특별히 겪지 않았다. 이 기간 그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경서를 탐구하고 중국과 조선 학자들의 정치론을 정리했으며, 환자(還上)·대동법(大同法)과 같은 조선의 법제를 깊이 분석했다. 국가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대원칙과 구체적인 절목이 조화를 이룬 책은 이와 같이 탄생했다.
책을 쓰던 과정에서나 마무리한 후에 유형원은 정동익(鄭東益), 정동직(鄭東稷), 배상유(裵尙瑜) 등 오래 사귀던 친구들에게 원고를 보여주고 그들의 의견을 자주 들었다. 친구들은 『반계수록』의 규모에 놀라고 또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중국의 삼대 사회를 모범으로 삼아 현실에 맞지 않은 점을 걱정했다. 뿐만 아니라 송대 성리학자들이 추구하는 학문의 목표와 다르지는 않은가 하며 많은 의문을 품었다. 유형원은 이들에게 현재를 중시하여 거기에 매몰되는 생각을 타파하지 않으면 영구히 어둠 속에 묻혀 벗어날 수 없음을 밝히고, 자신의 구상이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강조했다.
삼대(三代)의 법은 모두 천리를 제도화한 것이고 후세의 법은 모두 인욕을 제도로 만든 것이다. 인욕의 제도를 시행하면서 국가가 다스려질 것이라 생각하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삼대 이래의 제도를 천리와 인욕 개념으로 구분하고, 천리의 제도를 복원할 것을 주장하는 의식은, 천리·인욕의 도덕적 가치를 법제·제도와 연관하여 통일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였는데, 이러한 생각은 무엇보다 변법(變法) 개혁의 당위·필요성을 ‘천리’로 표상되는 절대 가치와 결합시킴으로써 극대화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반계수록』은 26권 13책 분량에 경제, 정치, 사회, 국방, 문화 전반에 이르는 법제를 담고 있다. 그 구성을 살펴보면, 「토지제도[田制]」(4권), 「교육과 관리 선발제도[敎選之制]」(2권), 「관료 임용제도[任官之制]」(1권), 「관직제도[職官之制]」(2권), 「녹봉제도[祿制」(1권), 「군사제도[兵制]」(2권)와 「속편(續篇)」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현제(郡縣制)」는 원고가 채 완성되지 않아 『반계수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뒷날 ‘보유편’으로 간행되어 『반계수록』의 일부를 이룬다.
유형원은 영역별로 법제를 먼저 제시하고 이어 이 법제를 만드는데 참고했던 경서와 역사서, 역대 학자들의 정치론, 자신의 의견을 묶어 ‘고설(攷說)’로 제시했다. 이를테면 「토지제도[田制]」·「토지제도 고설(田制攷說)」, 「교육과 관리 선발제도[敎選之制]」·「교육과 관리 선발제도 고설(敎選攷說)」등 법제와 고설이 반복되는 구조이다. 고설은 모두 ‘전제고설’, ‘전제후록고설’, ‘교선고설’, ‘임관고설’, ‘직관고설’, ‘녹제고설’, ‘병제고설’, ‘병제후록고설’이 있다.
이 같은 구성은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만들며 쏟아부었던 고민과 정성, 공력을 잘 보여준다. 유형원은 중국의 경서와 역사서 속의 논리와 경험, 조선의 역사 전통을 세밀하게 조사하고, 이로부터 조선에 적용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찾아내려 했다. 사안마다 집요하게 폐단을 추적하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적절한 법 조목을 만들었다. 『반계수록』은 노심초사, 피가 마르고 온 근육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나온 대작이었다.
유형원은 이들 여러 편목을 통하여 토지제 개혁을 비롯해, 중앙집권제의 강화, 과거제 혁파와 공거제(貢擧制) 시행, 노비제 폐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 제도의 재정비, 상업과 수공업의 국가적 관리제의 강화 등 국가 체제 전반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여기서 구현되는 국가 체제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된 조선의 그것과는 성격이 크게 달랐다.
『반계수록』에서 가장 비중 있는 법제는 토지제도였다. 유형원은 전통적인 토지제도를 해체하고 공전제(公田制)를 시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개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고 이를 다시 일정 규모로 재분배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토지 분배의 기준은 신분과 노동력으로, 농민에게 1경(頃)의 토지를 지급하고, 사대부에게는 최대 12경을 지급하도록 했다. 대부·사로부터 농민·상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분·직역에 토지를 분배하되, 사족은 우대하여 다른 직역보다 재분배의 면적을 크게 잡았고, 무당·박수·광대·승려 등에게는 토지를 지급하지 않았다.
『반계수록』에서는 이와 함께 공전제와 연계하여 병역(兵役)을 운용할 것을 구상했다. 곧 토지를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조직을 군사조직으로 직접 전환하여, 평시(平時)나 유사시에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이는 농업과 군역(軍役)을 일치시키는, 전형적인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제도였다.
유형원은 신분제 혹은 차등적 인간관계를 긍정했다. 양반과 비양반, 사·농·공·상의 서로 다른 직역, 적자와 서자의 차별 관계가 사회를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토지분배에서 사족을 우대하는 것은 여전히 사족 중심의 신분제 관념을 그가 지니고 있었던 까닭이다.
반면 유형원은 노비제는 반드시 철폐해야 할 악법으로 여겼으며, 그 방법으로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실시하여 노비의 수를 자연스럽게 줄여가고 또 고공제(雇工制)를 시행해, 노비를 대체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등 점진적인 소멸을 구상했다.
한편 『반계수록』에서는 상업과 수공업의 운영이 공전제와 연관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상인과 장인이 안정적인 생산 활동을 하려면 그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반계수록』』에서는 국가가 간여하여 이들 산업을 관리하고 진흥하는 체제를 구상하면서도 민간의 자율적인 경제활동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경국대전』의 육전체제(六典體制) - 육조(六曹) 중심의 관료제(官僚制)를 긍정하고 그 제도를 골간으로 행정 조직을 재정리하는 방식으로 개혁안을 구상했다. 우선, 비변사를 혁파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정상화하되, 이를 삼정승제(三政丞制)가 아니라 한 사람의 재상이 전담하도록 했다. 유형원은 이 방식이 비변사의 운영이나 삼정승제의 특징인 ‘합좌제(合座制)’를 대신하여 그 책임 소재가 분명하고 재상이 전권(專權)을 효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관련하여 유형원은 대간 제도를 줄이거나 혁파해야 한다고 보았다. 언관제도를 실시한 것이 언로를 넓히기 위해서였는데 이 제도가 도리어 언로를 막아버리고 불필요한 논의만 시끄럽게 만들어 내므로 이를 혁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형원은 사헌부는 그대로 두더라도 사간원(司諫院)은 혁파하여 모든 관원들에게 간언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정치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지면 ‘붕당(朋黨)’에 기초한 정치 운영 또한 혁파될 것으로 보았다. 사간원의 폐지와 언로의 확대와 같은 관료제 운영 방안은 곧 당파에 기초한 정쟁의 혁파책이기도 했다.
또한 불필요한 관서와 관원을 없애거나 줄이고자 했다. 충훈부(忠勳府)·중추원(中樞院)·독서당(讀書堂)·기로소(耆老所)·내수사(內需司) 등은 완전히 폐지하며, 의금부(義禁府)·포도청(捕盜廳)·전옥서(典獄署)·장예원(掌隸院)은 형조, 양현고(養賢庫)는 성균관, 예문관(藝文館)·경연(經筵)은 홍문관으로 흡수 통합하고, 종친부(宗親府)·의빈부(儀賓府)·돈녕부(敦寧府)·종부시(宗簿寺)는 종정부(宗正府)로, 훈련원(訓練院)·도총부(都摠府)·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은 병조와 오위(五衛)로,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사도시(司導寺)·사재감(司宰監)·사포서(司圃署)를 사옹원(司饔院)으로 통합하도록 했다.
각 기관의 기능을 조절하는 방안도 구상하였다. 춘추관의 경우에는 전임사관제(專任史官制)를 강화하고, 호조의 토지 측량 기능은 공조로 이관하며, 사헌부의 재용출납(財用出納)에 관한 감찰권(監察權)을 폐지하자고 했다. 이와 더불어 성균관을 정2품 아문(衙門)으로 승격시키고 진사원(進士院)과 연영원(延英院)을 신설할 것을 구상하였다. 교육과 관료 임용 제도가 개선되면 반드시 필요한 기관들이었다.
지방 제도 역시 크게 바꾸어, 면적을 중심으로 대부(大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의 4등급으로 지방행정 조직을 개편할 것을 구상했다. 이와 함께 지방사회는 수령(守令), 상부관(上副官), 향관(鄕官)을 근간으로 하는 공조직과 향리제(鄕里制)를 축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보았다. 향리제는 5가를 1통, 10통을 1리, 10리를 1향으로 하여 편제하는데, 종래의 면리제(面里制)와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 그리고 자치 기구로서의 향청(鄕廳)을 통합한 현의 하부 행정조직이었다.
관료의 구임법(久任法)을 시행하여 잦은 교체에 따른 폐단을 없애려고 했다. 중앙[京職]의 당하관은 6년, 외직(外職)의 수령·진장(鎭將)·교관(敎官)은 9년, 관찰사(觀察使)·도사(都事)는 6년 동안 근무하도록 했다. 특히 수령의 역할을 강조하여, 임기 9년의 수령직을 거치지 않으면 정3품의 당상관직에 승진하지 못하도록 했다.
학교제도도 관료제 개혁의 맥락에서 구상했다. 『반계수록』에서는 학교를 학문을 익히는 곳임과 동시에 관료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걸맞은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는 내용을 제시하였다. 학교는 지방과 서울에 걸쳐 3단계로 편성했다. 지방의 경우에는 읍학(郡․縣) - 영학[道], 서울은 사학(四學) - 중학(中學)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서울의 태학(太學)에서 교육을 마무리하도록 했다. 하위 단위의 학교에서 교육을 이수하면 선발을 거쳐 다음 단위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였는데, 최종적으로 태학을 이수한 자 가운데 덕행이 뛰어난 자는 조정에 천거하여 관인이 될 수 있게 했다. 이때, 천거된 자 중에서 조정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은 진사(進士)의 자격으로 진사원에서 1년 동안 연수하게 한 뒤 관직을 수행하도록 했다.
『반계수록』의 인재 선발 방식은 교육과 관료 양성을 일원화하고자 하는 성격을 지녔는데, 종래의 인재 양성과 선발의 방식, 교육의 내용이 전면적으로 바뀔 수 있는 방안이었다. 무엇보다 과거제가 철폐되어 시험을 위한 시험, 시험을 위한 교육이 사라지게 되고, 실무 능력과 덕행(德行)을 겸비한 인재를 국가에서 계획적으로 길러내고 활용할 수 있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반계수록』의 구상은 『경국대전』의 법제를 전면적으로 혁신하였으므로 여기서 전망하는 국가는 당시 조선과는 성격을 크게 달리하였다. 『반계수록』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크게 강화하는 가운데, 사적인 소유·사적인 권력에 기초하여 움직이는 사회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꾸어 토지, 사회구성원, 자연에 대한 국가적 관리를 중앙집권적인 체제 속에서 실현해 가고자 했다.
유형원 사후 『반계수록』은 바로 간행되지 못했다. 그의 자손·친지들은 이현일(李玄逸), 윤증(尹拯), 오광운(吳光運)과 같은 큰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반계수록』의 서문을 마련하는 등 출간을 준비했지만 간행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 과정에서 『반계수록』은 필사본의 형태로 유통되었고, 배상유(裵尙瑜), 양득중(梁得中) 등은 조정에 상소하여 『반계수록』의 존재를 알렸다.
『반계수록』을 간행하기 위한 노력은 1770년(영조 46)에 결실을 보아 영남 감영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일은 홍계희(洪啟禧)가 적극 주도하여 영조의 허락을 받아 진행되었는데, 처음에는 남한산성에서 간행하기로 했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영남으로 장소를 옮겨 마무리했다. 인쇄본은 영조에게 진헌하고 4사고(史庫)에 보관했으며, 관료들 가운데 책이 필요하면 인출(印出)을 허락했다. 개인의 저술을 국가의 재정으로 간행한 일은 흔치 않았다. 『반계수록』은 이후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반계수록』을 읽은 이들은 대체로 삼대의 제도가 세세하게 법 규정으로 정리된 것에 감탄하며 이로부터 고대 유교의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그중에는 이 책의 개혁안을 원용하여 적극적인 현실 개혁책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익(李瀷)은 『반계수록』의 핵심 법제인 공전제는 실제 실현하기 어렵다고 보고 긴 시간에 걸쳐 점진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는 한전제(限田制)를 고민했고,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을 혼용한 정전법(井田法)을 모색했다. 이들의 작업은 『반계수록』을 이상론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려던 새로운 시도였다.
조선후기 사회에서 국가 개혁안 혹은 이상 사회론의 전범으로 여겨지던 『반계수록』은 근현대 한국에서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을 담은 책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은 1945년 이후였다. 실학 연구가 큰 힘을 얻으면서 『반계수록』은 실학의 단초를 마련한 경세서로 주목받았고 유형원은 실학의 ‘비조(鼻祖)’라는 이름을 얻었다. 실학의 세분화가 이루어지면서는 홍대용·박지원 등의 ‘이용후생학’과는 구별되는 ‘경세치용학’의 문을 연 책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반계수록』이 초기 실학의 형성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파악하는 시각은 이 책으로부터 근대의 싹을 찾을 수 있다는 인식과 맞물려 있었다. 20세기 한국 사회에서 실학은 근대성을 갖춘 학문·사상으로 이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래에 이르러 『반계수록』에서 근대성을 찾는 것은 역사적 맥락에 맞지 않으며, 성리학의 사유체계를 충실히 반영한 개혁론의 측면에서 이 책의 성격을 살펴야 한다는 의견도 대두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실학의 근대성을 긍정하지 않는 판단과도 연결된다. 앞으로 우리 학계의 『반계수록』 이해는 이러한 점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의를 거치며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