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 1945년
「지원 안한 학도 징용, 5일 훈련소에 일제히 입소」, 『每日新報』(1943년 12월 7일)
고신문디지털컬렉션(국립중앙도서관)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제는 패전의 기색이 짙어지자 1944년 9월부터 조선인 징병제를 전면 시행하기로 하였다. 징병제 시행을 앞두고 일제는 징병 적령을 넘어서서 병역에서 제외된 조선인 대학생을 동원하기 위한 ‘학도지원병제’의 실시를 발표하였다. 학생들은 침략전쟁에 반대하거나 전쟁에서의 희생을 꺼리면서도 관헌의 압력과 사회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다수가 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온갖 회유와 강제력 행사에도 끝까지 지원을 거부한 학생들이 있었다. 일제는 학병 거부자를 ‘비국민’ ‘사상범’으로 낙인찍었고, 지원이 끝나자마자 이들에게 징용영장을 발부하였다. 학병 지원을 거부한 학생들을 징용하여 사회에서 격리시키고자 한 ‘학도징용’이었다. 이들은 주로 서북지방의 시멘트공장으로 배치되어 강도 높은 정신훈련으로 정신개조를 요구받았고,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육체적 고통을 겪으면서 해방이 될 때까지 부상과 질병에 시달렸다.
징용된 학도는 신념을 가지고 일제의 총동원정책을 거부했던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존재이다. 학도징용은 조선인 지식인의 신체를 억압하여 저항의식을 말살시키고자 추진된 정책으로서, 일제의 총동원체제가 통제와 억압, 격리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942년 5월 일본 정부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시행한다고 발표하였다. 1944년 9월부터 만 20세가 되는 조선인 남성을 일본군으로 징병한다는 내용이었다. 징병제의 전면 시행을 앞두고 1943년 10월 20일 일제는 ‘소화18년도육군특별지원병임시채용규칙’을 공포하여, 조선인 학도지원병 모집계획을 발표하였다. 징병 적령 이전에 출생하여 병력 동원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조선인 대학생을 입영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 제도의 일정은 매우 촉박하였다. 법령 공포 후 5일 만인 10월 25일부터 11월 20일까지 원서를 접수하여, 12월 20일까지 적성검사를 하고, 다음해 1월 20일에 입대하는 일정이었다. 갑작스럽게 일제의 전쟁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결정에 학도병 혹은 학병이라 불렸던 학도지원병의 ‘지원’ 대상이 된 학생들과 그 가족들은 혼란에 빠졌다.
일제는 조선인 입영 자격자를 약 5천명으로 파악하였다. 조선에 있는 법문계열 대학생이 약 1천명,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는 대학생이 약 4천명이었다. 일제는 ‘강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가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조선인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학도병 지원으로 증명하라’고 강조하는 등, ‘적격자’ 100%의 지원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마감 10일 전까지 지원자는 200명 정도에 그쳤다. 이에 학무국장 오노 겐이치(大野謙一)는 ‘지원하지 않는 자는 중점적 산업공장으로 징용하겠다’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지원을 다그쳤고, 총독부는 지원율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활용하였다. 조선과 일본을 연결하는 부관(釜關)연락선과 항구 등지에서 미지원자 색출작업을 벌였고, 잠적한 학생들을 찾기 위해 행정기관과 경찰을 동원해 매일 가택을 수색하고 가족들을 협박하였다. 가족의 대리 신청도 유도하였으며, 학교 측에는 ‘거부자의 퇴학’을 운운하면서 학생들에게 지원을 재촉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 육군성에서는 규칙을 개정하여 직전 학기에 조기 졸업시킨 1천 700명을 추가로 지원 대상자에 포함시켰다.
아울러 언론과 사회 저명인사의 강연을 통해 학병 지원의 당위성을 조직적으로 홍보하였다. 총독부는 일본 각 대학의 ‘졸업자 선배단’을 조직하여 총궐기를 촉구하였고, 지역별로 대상 학생과 학부형을 모아 간담회를 열어 대대적인 선전을 하였으며, 지원하지 않는 사람은 ‘비국민’ ‘배신자’로 몰아갔다. 『매일신보(每日新報)』와 『경성일보(京城日報)』는 1면의 대부분을 학도지원병 관련 기사로 채웠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학병 지원은 선택이 아닌 의무로서 강조되었다. 학생들은 당황하고 분노한 가운데 사회적으로 조장된 분위기에 떠밀리거나 가족들을 향한 주변의 비난과 행정상의 불이익을 이기지 못해 지원하기도 했다. 경성제대와 법학전문, 연희전문, 보성전문 등 조선의 대학생과 도쿄제대, 와세다대, 메이지대 등에 재학하는 일본 유학생 중 귀국한 학생, 일본에 머물러 있던 학생, 1943년 가을 졸업자 등 전체 대상자의 70% 가까운 숫자가 원서를 제출했다.
근 한 달간 학도지원병 독려를 위해 공권력과 언론을 총동원하여 고, 학생을 꼼꼼히 색출하고 가족을 압박했지만, 여전히 많은 대학생이 지원을 거부하였다. 적지 않은 ‘비지원자’들은 산간벽지로 숨거나 국외로 도피하였고, 호적을 고치거나 사망신고를 하면서 학병 동원을 기피하였다. 패전의 기색이 역력한 당시의 전황에서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지식인들이 학도지원병을 거부한다는 것은 ‘일본 군대에서 복무하고 싶지 않다’는 소신과 일제가 일으킨 전쟁에 반대한다는 의미를드러내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그 파장을 차단하고자 학도지원병 거부자를 심각한 ‘사상범’으로 취급하면서 곧바로 그들에 대한 응징 조치를 취하였다. 학병 모집이 끝나자마자 1943년 11월 28일 조선총독부는 각 도지사 명의로 비지원자에게 징용 영장을 발부하였다. 병력으로 동원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징용의 형식으로 이들을 노동력으로 강제동원하여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동시에 응징하고자 한 것이다. 징용 대상자에는 학병 모집에 지원했으나 적성검사를 기피하여 자동으로 학병에서 탈락된 사람도 포함되었다.
징용 영장에는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장소로 출두하지 않을 경우 국가총동원법 규정에 의거하여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 엔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곧 학병에 지원하지 않으면 징용이 되고, 징용에 응하지 않으면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처벌받는 구조였다. 애초부터 학도지원병의 ‘지원’은 선택이 아닌 의무로서 징병과 같은 성격으로 추진되었음이 확인된다.
요란했던 학도지원병 모집이 끝나고 며칠간 잠잠했던 사회는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지원병 모집을 거부한 대학생들에게 행정기관이 다시 나서서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 대해서도 ‘비국민’ ‘무뢰한 조선인’으로 낙인찍고, 사찰하거나 식량 배급을 제한하는 등의 제재를 가하였다. 학도지원병 거부자에 대해 일제는 ‘그릇된 미영사상(米英思想)과 공산사상(共産思想)이 침입하여 반도의 순진한 청년들을 그르친 결과’이자 ‘책임 관념이 없고 인내력이 부족한 이조 5백년의 유물’이라고 비판하였다.
다시 경찰이 해당 학생의 학교와 하숙집으로 수시로 찾아와 검문을 하였다. 고, 국외로 피신했다가 귀국하자마자 체포된 학생도 있었고, 일본에서 검문당해 동원된 경우도 있었다. 인근 지역에 사는 학병 지원자 학부형들의 질시와 손가락질도 견디기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군의 이름으로 출정하거나 목숨이 위태로운 전쟁터에 나가는 학도지원병만 피할 수 있다면 징용을 선택하겠다고 하는 학생들도 존재했다.
학도지원병 거부자의 징용은 1943년 12월 5일과 1944년 1월 15일, 2월 9일 3차례에 걸친 공식 동원과 더불어 학병 거부자가 단속될 때마다 수시로 진행되어, 최소 400명 넘는 숫자가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징용학도 중에는 국내외 여러 대학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사학자 한우근, 영문학자 여석기, 사회운동가 계훈제 문교부차관 서명원 등도 학병 지원을 거부했다가 징용된 사람들이다.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 피해자로 신청한 ‘징용학도’도 10명에 이른다.
징용학도는 학도지원병 모집을 기피한 ‘국체를 거부한 사상범’으로서, 2주간 인간개조라는 이름의 고된 정신훈련을 거친 후 노동현장으로 배치되었다. 엄격한 집단생활을 통해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황국신민으로 개조시킨 후 중요한 군수산업 부문에 배치한다는 취지였다. 2주간의 정신훈련은 태릉 주변의 제일육군지원병훈련소에서 진행되었다.
훈련소에서는 ‘사상범’에 대한 정신 재단련 과정이자 엄격한 징벌로서, 식사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훈련으로 채우는 격한 연성(鍊成)이 반복되었다. 정신교육 시간에는 차가운 강당 마루에 앉아 ‘천황’에게 충성스럽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했고, 윤치호, 이광수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내선일체를 외치며 황국신민이 되라고 열변을 토하거나 조선총독이 ‘잘못을 뉘우치고 갱생하면 더 이상 죄는 묻지 않겠다’고 하는 연설을 들어야 했다. 매일 저녁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일제의 통치에 대한 감사하는 일기와 작문을 써서 검열받는 일은 고문에 가까웠다.
징용학도의 훈련을 담당할 조교로는 ‘백전연마의 교관들’을 배치하였다. 조교는 주로 조선인 지원병 중에서 뽑았는데, 조선인 대학생에 대한 혹독한 훈련을 조선인을 통해, 그것도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열등의식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을 통해 시행하도록 한 일제의 전형적인 식민지 통치방식이었다. 무자비한 체벌과 욕설로 징용학도 사이에 “오니군소(惡鬼軍曹)”라는 별명으로 불린 송요찬을 비롯한 조교들은, 짧은 기간에 ‘국가관념이 전혀 없는 이들을 황국신민으로 개조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훈련소 과정을 마친 후 징용학도들은 조선총독부 교통국의 원산철도공장이나 조선 오노다(小野田) 시멘트의 천내공장, 승호리공장, 삼척공장 혹은 조선시멘트 해주공장, 조선 아사노(淺野) 시멘트 봉산공장 등으로 배정되었다. 노동 현장에서는 징용학도들이 일반 노무자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이들의 숙소와 노역장을 일반 노무자와 격리시켰다. 작업장 생활은 훈련소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침 기상 이후부터 밤에 소등할 때까지 고된 정신훈련과 노동을 반복하는 강도 높은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가혹한 처우로 이들의 저항의식을 말살시키고자 특별관리를 하였던 것이다.
징용학도의 관리는 퇴역한 일본 군인이 맡았다. 그들은 숙소와 작업장에서 징용학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감시하였다. 일기와 편지를 검열하였고 만약에 대비한 필적감정까지 하였으므로 징용학도들은 일상적인 공포 속에서 정신적으로 위축되어 갔다. 열악한 시설의 숙소에 수용되어 외출은 금지되고 규칙만 있는 생활 속에서 이들은 창살 없는 형무소 생활을 하였다.
작업장에서 이들에게 배정된 일은 힘들고 위험하여 노무자들도 기피하는 일이었다.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석회암 발파·분쇄·운반, 시멘트 가루치기·포대 운반, 용광로 수리, 일본인 사택 변소 오물 처리 등의 일이 주어져, 육체적 한계와 정신적 모멸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런 작업장으로의 배정은 당사자에게는 징벌의 의미가 강하였지만, 기업 측에는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는 노무자원 보충의 의미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기아를 면할 정도의 형편없는 식사가 지급되어 항상 배가 고프고 일은 고되었으므로, 징용학도들이 맨 처음 배치되었던 교통국 원산철도공장의 채석장에서는 이내 20여 명의 결핵환자가 나타났다. 영양부족, 과로 등으로 영양실조나 결핵 등 각종 질병이 발생하였고, 먼지가 많고 위험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폐병에 걸리거나 부상을 당하는 등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오노다시멘트 천내공장 측에서 작성한 자료를 보면, 1944년 2월 말 징용학도들이 작업장에 배치된 지 2개월 만에 폐와 장의 문제가 심각해져 질병과 사고로 인한 결근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났고, 약 4개월간 근무한 후에는 대부분 설사나 복통, 감기, 흉통이나 폐문침윤증(肺門浸潤症), 곧 폐병을 앓고 있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를 정도의 기아와 공포 속에서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고 삶을 살고 연일 계속되는 중노동으로 열악한 작업환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징용학도들은 주변의 감시 속에서 그에 저항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드물지만 탈출을 시도하여 성공한 경우가 있었다. 해방되기 보름 전 오노다 시멘트 천내공장에서 몇 명이 화물열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탈주하기도 하였고, 병가를 받아 서울의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후 숨어 있다가 해방을 맞은 사람도 있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오후 2시, 이들은 안재홍이 ’전국 학생에 고함‘이라는 우리말 방송을 하는 것을 듣고서야 해방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조선인 징병의 전면화를 앞두고 일제가 시행한 조선인 학도지원병 모집은 ‘지원’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입영을 강요한 것이었고, 그에 응하지 않은 대학생들은 총동원체제를 거부한 사상범으로 몰려 ‘징용’되기에 이르렀다. 학도지원병과 학도징용은 일제가 식민지의 최고 엘리트까지 전쟁터로 동원해야 했고, 이를 기피한 학생들은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강제 노동으로 처벌해야만 유지될 수 있었던 총동원체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