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신해혁명(1911년)은 중국에서 2천 년 이상 지속된 황제지배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수립한 사건이다. 중국 및 동아시아에서 공화제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국가 건설의 출발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세기 말부터 청조에 대항하여 혁명 활동을 해 온 쑨원이 중화민국(中華民國) 초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통일적 지도력과 대중적 지지기반이 부재한 데에다 군사력도 빈약하여 국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혼란 중에 유력한 군벌이었던 위안스카이가 총통직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후 중화민국은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군벌할거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신해혁명은 청조의 내우외환 끝에 일어난 혁명이다. 끈질긴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과 주권에 대한 위협, 건륭말기부터 시작된 백련교도의 난과 19세기 중반 남부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운동 등이 청조의 통치 기반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중국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경제적, 군사적 침략을 여러 지역에서 진행했고, 이것이 중국 내부의 정치적 불안과 결합하였다. 청조는 열강의 침략을 방관하거나 태평천국운동과 의화단운동의 진압에 열강의 군사력을 이용하는 등의 행태로 민중의 불신을 키웠다. 여기에 만주족으로 구성된 청 조정에 대한 민족적 반감이 더해져 반청혁명의 불씨가 생겨나게 된다. 쑨원(孫文)이 쓴 「중국동맹회혁명방략(中國同盟會革命方略, 1906)」 중 첫 번째 강령 “구제달로(驅除㺚虜-오랑캐를 몰아낸다)”에 이러한 반청 사상이 담겨있다.
청조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겪으며 1860년대에는 양무운동, 1898년에는 변법운동을 통해 신식무기 및 자원개발, 정치제도 개혁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는 만주족의 권력 약화를 염려한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 만인(滿人)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1900년 의화단 운동 여파로 열강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을 떠안게 되고, 정치적 정당성을 크게 실추한 청조는 캉여우웨이(康有爲, 1858~1927)와 같은 유신파 지식인들의 청원과 지지에 힘입어 ‘신정(新政)’을 펼쳤다. 신식군대 창설, 과거제도의 폐지, 새로운 학제 마련, 산업진흥 등이 추진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헌법 제정 및 국회와 유사한 기관의 창설을 추진했다(다만 이는 도중에 신해혁명이 발발하며 무산되었다). 이러한 청조의 개혁은 황제체제를 유지한 채 중국을 중흥시키려는 시도였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중국에는 학회 설립, 잡지 발간, 신지식을 가르치는 학교 설립 등의 방식으로 새로운 지식이 전파되었다. 이에는 점진개혁을 통해 중국을 구하려는 유신파 지식인과 체제전복을 추구하는 혁명파 지식인 모두 예외가 없었다. 이때 수입되고 전파된 공화주의, 사회진화론, 국제법체계,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은 이후 중국사회의 개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양무운동에서부터 추진되었던 산업과 공업의 발전, 그리고 이를 통한 부국강병은 모두가 바라던 바였지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사회의 근본적인 기반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를 신지식의 토대 위에서 논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개조는 노동자, 농민, 여성 등에 대한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 토지에 대한 권리를 고르게 하여 경제적 차별과 어려움이 없는 사회, 국가의 권력은 민(民)에게서 나오는 공화국 성립으로 그 대체적인 방향을 잡게 된다. 「동맹회혁명방략」의 16자 강령인 “구제달로, 부흥중화(復興中華), 창립민권(創立民國), 평균지권(平均地權)”이나, 훗날 국민당의 강령인 삼민주의(三民主義-민족, 민주, 민생)에서 이러한 새로운 사상과 지향을 엿볼 수 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하자, 중국 사회는 망국의 불안감이 높아졌다. 청조가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혁명파는, 제국주의 열강과 같은 근대국가를 지향하며 청조를 전복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 혁명파의 구심점이 된 사람이 바로 쑨원이었다. 첫 번째 무장봉기는 1895년 광저우(廣州)에서 일어났고, 지식인들과 군인, 비밀결사들이 참여했다. 청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무장봉기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1900년에는 2만 명이 규합하여 후이저우(惠州)에서 봉기가 일어나 청군을 대파했고, 1911년까지 열 차례나 봉기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많은 혁명가들이 희생되었다.
봉기 지역은 대부분 중국 동남부나 국경지역이었다. 이는 해외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조달하여 변경에서부터 봉기를 일으키고, 이로써 중국 각계각층의 호응을 유도한다는 혁명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전국적 호응을 얻거나 청조를 전복시킬 수 있는 무력 동원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했다. 당시 혁명파 중에는 동남부가 아니라 창장(長江) 유역이나 베이징(北京)에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등 다양한 의견이 분분하였다. 또한 자금이나 무기가 부족한 상태였으므로 청조의 탄압이나 열강의 간섭을 버티기 힘들었다. 하지만 각지에서 거듭된 봉기는 청조의 권위를 무너뜨렸고 점차 혁명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11년(辛亥年) 10월 9일, 우창(武昌)에서 무장봉기를 준비하던 신군(新軍)의 폭탄이 실수로 폭발하여 발각되자 청조는 진압을 시도했고 무장봉기 지도부는 모두 피신했다. 그러나 뒤에 남아 물러설 곳이 없던 신군은 아예 이를 계기로 10일에 봉기를 일으켰다. 11일에는 바로 리위안훙(黎元洪, 1864~1928)을 도독으로 하는 혁명군정부(革命軍政府)를 수립했으며, 국호를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고 내세웠다. 이어서 12일과 13일, 근방의 한커우(漢口)와 한양(漢陽) 신군의 호응을 얻으면서 우한(武漢)지역이 혁명군의 세력 아래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중국 남부의 많은 성(省)들과 상하이가 호응하며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혁명군에 가담하였다. 11월 15일 상하이에서 각 성 도독부(都督府) 대표연합회가 결성되어 12월 3일 임시정부조직대강 21조를 제정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북부는 여전히 청조의 영향하에 있었고, 큰 혼란을 염려한 영국의 중재로 청조와 혁명군 사이에 남북화의(南北議和)가 열려 전쟁은 멈추게 되었다. 이때 북쪽의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청조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혁명군과 화의에 나섰다.
당시 해외에 도피중이던 쑨원은 해외로부터 혁명을 위한 지지와 원조를 얻고자 활동 중이었다. 구심점이 없던 혁명군은 쑨원의 귀국을 요청했고 그는 12월 25일 상하이(上海)로 돌아왔다. 12월 29일 쑨원은 임시대총통에 선출되었고,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성립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중화민국은 난징(南京)을 임시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난징임시정부(南京臨時政府)라고 한다.
그러나 정치력과 사회적 지지기반이 약하고 군사력도 빈약했던 혁명정부는,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정을 선포한다면 총통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위안스카이에게 약속했다. 위안스카이는 직접 룽위(隆裕) 황태후와 협상했고, 1912년 2월 12일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가 퇴위했다. 그리고 1912년 4월 위안스카이는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혁명정부가 위안스카이에게 정권을 이양한 이유는 혁명파 내부의 분열과 리더십의 부족, 군사력의 부족 때문이었지만, 만약 북쪽의 군벌들과 혁명파가 전쟁을 할 경우 중국이 사분오열 할 수 있다는 위기감[‘과분(瓜分)’의 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은 중국 여러 지역에서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조차지(租借地), 조계지(租界地)의 형식을 빌려 치외법권(治外法權)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전이 일어난다면 중국이 철저히 붕괴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912~1913년에 치러진 중화민국 최초 국회선거에서 국민당(國民黨)은 압승을 거두었다. 이제 동맹회는 비밀스러운 혁명단체에서 ‘국민당’이라는 명칭을 내 건 공개적인 정당으로 탈바꿈하고 의회정치를 이끌게 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유력한 내각총리 후보였던 국민당 지도자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하는 한편 국회의 동의 없이 차관을 도입하고, 국민당계 지방 도독들을 면직시키는 등 혁명파를 탄압했다. 이에 쑨원, 황싱(黃興) 등이 위안스카이를 토벌하는 봉기(제2차 혁명)를 일으켰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실패했고 국민당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명실상부한 실권자가 된 위안스카이는 중앙의 권한을 강화했고, 1915년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시도했다. 이에 전국적인 반대 투쟁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위안스카이가 사망하며 황제체제 복고는 실패하였다.
중국 전역을 통치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중국은 한동안 각 지역의 군벌들이 자신의 세력권을 통치하며 경쟁하는 군벌할거시대(軍閥割據時代)로 들어가게 된다. 군벌들 사이의 경쟁은 통일된 근대국가 형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때로는 외세와 결탁하여 이권을 넘겨주고 무기를 사들이거나 외채를 받는 등의 행태를 보여 경제는 더욱 악화되고 빈발하는 전투로 인해 중국인들의 고통이 가중되었다.
한편 1916년 이후 쑨원과 국민당은 여러 차례 군사적·정치적 위험을 겪었다. 1921년이 되어야 소련의 도움을 받아 국민당을 개조하기 시작하였고, 1924년 공산당과의 합작으로 진행한 국민혁명을 통해 1928년경에는 중국의 많은 지역이 국민정부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 이후의 국공내전 등의 혼란이 이어지며 통일된 근대국가 건설에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 민족문제
혁명파는 처음에는 만주족 지배로부터 한족(漢族)이 독립한다는 지향을 품었을 뿐, 다른 민족의 문제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신파는 만주족 및 다른 민족들을 배제한다면 중국의 분열과 열강의 간섭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것이 반영되어 중화민국 건설 이후 ‘오족공화론(五族共和論)’이 등장한다. 그리하여 청조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민족들을 모두 아우르는 ‘중화민족(中華民族)’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방향으로 중화민국의 원칙이 세워졌다. 1912년 〈중화민국 임시약법〉에는 “중화민국의 영토는 22개 성, 내·외몽골, 티베트, 칭하이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처음 중화민국의 국기가 오색기(五色旗 ̄각각 한(漢), 만(滿), 몽(蒙), 회(回), 장(藏)을 상징)를 채택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청조의 판도에 속했던 일부 민족은 독립을 선언했다. 몽골은 1911년 11월부터 몽골 독립을 논의하여 12월 몽골이 만주의 지배에서 벗어난다고 선포했다. 달라이라마 13세는 서장(西藏-티베트)에서 청조 관원을 내쫓고 1912년 청조 계승자에 대한 티베트의 예속관계 중지를 선포하는 포고를 발표했다. 그러나 1913~1914년 열린 티베트, 영국, 중국 3자의 심라(Simla)회의에서 티베트는 티베트의 독립을 주장하고, 영국은 티베트로부터 9만 제곱킬로미터의 토지를 할양받고자 했다. 이에 중국은 이 회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티베트 영토를 두고 영국과 러시아가 상호 견제하는 가운데 중국은 티베트가 영국과 직접 협약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그 지역에 대한 주권을 계속 주장했다. 외몽골은 러시아 및 소련의 지원을 받았는데, 오랜 기간 독립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1945년 정식으로 독립하였다. 한편 내몽골 왕공들은 오족공화론에 동조하며 중화민국을 따르기로 하였다.
2) 참정권과 평등의 문제
일찍이 동맹회에는 허샹닝(何香凝), 추진(秋瑾) 등의 여성들이 참가했으며, 신해혁명 시기에는 여성 혁명군대가 창립되고, 혁명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여성단체들도 여럿 생겨났다. 우한의 혁명정부에도 여성들이 활발히 지원했는데, 이러한 활동과 함께 여성들의 참정권운동이 일어났다. 1912년 2월 3일 임시약법의 제5조에 “중화민국 인민은 누구나 평등하다. 종족, 계급, 종교의 차별이 없다”라고 정의하였으나, 남녀평등을 명확히 하지 않았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에 대해서도 여성들의 권리를 명시하지 않았다. 성의원 선거에서는 남성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규정하였다. 탕췬잉(唐群英)을 비롯한 참정권 운동가들은 난징에서 열린 참의원 회의에 들어가 폭력 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쑨원에게 직접 찾아가 중화민국헌법에 남녀평등을 명시할 것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쑨원은 이를 진지하게 논의하겠다고 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1년 11월 광둥성(廣東省)에서는 여성대의원이 선출되었으나, 중앙에서 여성참정권을 부정하여 이들의 당선이 취소되었다. 군벌할거시대에도 여성들은 여성단체를 만들어 국민당과 군벌들에게 여성에게 참정권을 보장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에 일본의 침략 등으로 중화민국 헌법 제정은 미뤄지면서 중화민국 내에서 여성 참정권은 1940년대가 되어도 명문화되지 못했다. 한편 1931년 공산당 통치하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에서는 남녀평등을 명문화하였다.
메이지유신(1868)으로 근대화에 앞장서고 있던 일본은 선진 사상을 수용하는 창구 역할을 하게 되면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많은 중국인 학생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쑨원의 동맹회도 중국인 유학생들이 모여 있던 일본 도쿄에서 1905년 7월 결성됐다. 동시에 중국의 신해혁명은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일부 정치인 사이에서 중국이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채택한 것을 두고 혁명의 확대를 걱정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중국에서의 공화제 출현을 보고 일본의 정치체제에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여론도 생겨났다.
한편 한국의 독립지사들 중 여럿이 중국 신해혁명의 발발 소식을 듣고 중국의 지원을 받아 한국의 독립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1906년 상하이로 망명해 있던 김규흥(金奎興)은 광둥(廣東)에서 혁명파들의 활동에 직접 참가했고, 신해혁명 직후에는 광둥도독부의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중국 혁명파의 지원 하에, 박은식(朴殷植)을 초빙하여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향강잡지》를 펴냈다. 신규식은 혁명에 힘을 보태기 위해 기부금을 냈고, 위안스카이 토벌 봉기에 가담한 김진용(金晋庸), 이관구(李觀九) 등의 인물도 있다. 혁명의 열기가 높았던 1912년 신규식과 조성환은 중국의 혁명을 도우며 한국의 독립을 추진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를 설립하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어 활동하다가 마침내 1919년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