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상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중일전쟁 시기 각각의 지역을 통치하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전후처리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국공양당의 연합정부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내전에 반대하는 국민의 여론도 높았지만, 결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고야 말았고 이 국공내전은 약 4년간 지속되었다. 내전을 거치면서 국민당은 기존의 도시 중심의 통치지역에서 국민들의 신망을 잃었고 부패와 내부 갈등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농촌 지역에서 근거지를 만들고 항일전쟁 시기 농민 중심의 지지 세력을 다져온 공산당은 민심을 얻게 되고 또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도 강해져 대륙 전체를 통일하게 된다. 대륙에서 밀려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쫓겨가 그곳에서 중화민국의 적통을 내세우며 자리 잡는다. 이리하여 양안에 국민당과 공산당 두 개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고 이후 냉전시기를 맞아 상호 갈등과 경쟁을 지속하게 된다.
1931년 일본은 본격적으로 동북지역을 침략하여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1937년 남하하며 전면적인 중국 본토를 침략하였다(중일전쟁). 일본이 중국 본토를 노리는 와중에도 국민정부와 중국공산당 간의 무력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국민정부는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일부 지역을 내어주면서, 골칫거리인 공산당을 우선 공격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부저항정책(不抵抗政策)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군벌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를 납치하여 일본에 항전하기를 요구하는 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힘을 합쳐 일본에 저항하기로 하고(제2차 국공합작), 공산당이 통치하던 지역은 국민정부의 행정구역으로, 공산당의 홍군(紅軍)은 국민정부 군대에 편입되어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국공합작 시기에도 일본군, 국민당, 공산당 3자 간의 전투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는 가운데, 8월 10일부터 중국공산당의 군대는 자신들의 점령 지역에서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국민정부는 일본군에게 국민당군이 도착할 때까지 항복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며, 국민당군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에게 치안유지의 임무를 맡기기까지 하였다. 국민당의 중심은 내륙 깊이 있었고 공산당 군대는 일본 점령지와 가까운 곳이 많았기 때문에 공산군은 일본군과 직접 싸우면서 중소도시들을 점령해 나갔다.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갈등에는 미국과 소련도 개입했다. 1945년 8월 14일 소련은 국민정부와 중소우호동맹조약(中蘇友好同盟條約)을 맺고, 중국의 내전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당시 소련은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조정을 통해 평화로운 정부 수립을 기대하였지만, 국민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국민정부에 지속적으로 병참, 재정, 물자를 제공했다. 미국 해군과 공군의 수송 지원을 받은 국민당은 동남 연안 도시에서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하였는데, 항복한 일본군은 128만 명, 친일 정부군은 60만 명이었고, 막대한 양의 무기도 접수하였다. 미국의 지원과 투항한 일본군은 국민정부가 공산당을 공격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또한 중국에서 철수하지 못한 일본군을 국공내전에 차출하여, 국민정부의 철도시설 수비, 공산군과의 전투 등에 투입하였다.
1945년 중국공산당이 통치하던 해방구에서는 토지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중일전쟁시기의 친일파 지주에 대한 투쟁이 벌어졌다. 소작료와 이자의 인하를 위한 운동(감조감식운동減租減息運動)을 시작으로, 1946년에는 지주의 토지를 유상으로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였으며, 또한 농민을 압박하고 수탈한 토호들은 토지로써 그 죄를 상환하게 하였다. 1947년 10월에는 〈토지법대강(土地法大綱)〉을 발표하여, 지주와 부농의 토지를 몰수하는 더욱 급진적인 정책을 실행했다. 국공내전 와중에 이러한 토지개혁은 광범위한 농민인구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주효했다. 미국은 국민당에게도 토지개혁을 권했으나 국민정부는 주요 지지 세력인 지주층에 불리한 토지개혁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국내 여론은 평화적인 통일국가 건설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 모두 이러한 여론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1945년 하반기부터 양자 간의 협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국민정부가 대일항전을 위해 옮겨 간 수도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 사이에 직접 협상이 열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10월 10일 협정에 서명하였다(雙十協定). 여기서 홍군의 철수 및 군사력의 축소, 공산당과 중도정치세력이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政治協商會議)의 개최 등을 규정하였다. 이 협정을 놓고 중국내 여론은 내전을 피할 수 있게 되었음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 회담이 이루어지던 시기 국민정부는 비밀리에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리고 10월 중순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1946년 1월에는 미국의 조정 하에 국공쌍방이 휴전명령을 내리고 군대의 이동을 중지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월 10일 충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및 민주당파 등 다양한 그룹의 38명이 참가한 연합정부의 수립을 위한 협상, 즉 정치협상회의를 개최했다. 이 협상에서, 여러 정파의 민주적인 참여하에 정부 개편, 평화적 건국 계획, 군대의 국가화(국민당군과 홍군의 통합) 및 양당 군대의 단계적 축소, 국민대회 소집, 지방자치를 광범하게 허용하는 민주헌법의 기초 등을 결의했다. 그리고 「화평건국강령(和平建國綱領)」 및 「헌법초안」, 「정부조직안」, 「국민대회안」 등을 채택하며 향후 국가 구성과 운영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3월 중국국민당 제6기 제2차전국대표대회 중앙위원회는 정치협상회의의 결의를 파기했고, 국민정부는 공산당에 대한 공격, 정치범 석방 거부, 反국민당 세력에 대한 비밀경찰의 습격 등 강경한 행동을 재개했다. 미국은 국공내전을 종식시키는 동시에 국민정부를 돕고자 했으나, 국민당의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국민정부는 1946년 5월 1일 난징으로 천도했고, 홍군에게 중국 북부 및 동북지역의 주요 거점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국민당 측은 아무런 양보를 하지 않았다. 홍군은 이 요구를 거부하고 국민당과의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46년 7월 내전이 중국 전 국토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 국민정부는 정부 인사들의 투기와 부패 방관, 내부 분열 등으로 점차 국민들의 신임을 잃어갔다. 또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 징집과 과세로 국민에게 부담을 지웠고,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내 급격한 물가상승을 초래했다. 이로 인해 특히 도시지역의 봉급생활자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외에도 외환시장 개방, 무역자유화로 국내 생산의 보호가 불가능해지고, 일본 기업의 생산 설비는 국유화하여 민간기업이 국유기업과 경쟁하기에 불리한 경제구조가 들어섰다. 그리고 국가 재정이 불안한 상태에서 미국의 원조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져갔다. 이러한 경제와 재정 정책의 무능함은 미국의 원조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일부 자본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민족자본가들이 국민당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경제정책의 실패로 도시지역의 실업자가 증가했고, 농촌지역에서의 징발과 세금부담 증대는 도시로 향하는 농촌인구 유출로 이어졌다. 아울러 자연재해로 인해 수백만의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학생운동은 국민정부에 대해 가장 앞장서서 비판의 목소리를 보여주었다. 1946년 12월에 주둔 중인 미군에 의한 여학생 성폭력 사건이 벌어져, 전국 학교에서 동맹휴학을 하고 50만 명이 참가한 시위가 일어났다. 상하이에서는 내전과 재정투기 등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이 있었는데, 국민정부는 이러한 학생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그러나 오히려 저항은 더 거세졌고, 자유주의 지식인들까지도 국민당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노동운동과 상점 주인들의 시위도 벌어졌다. 이후 1947년 2월 타이완에서 일어난 2·28 사건은 역사적으로 다른 국면에 속하지만, 국민당이 강압적으로 민중을 수탈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는 점에서 대륙에서의 저항과 공통점이 있다.
만주국의 옛 영토인 중국 동북지방에 진주하였던 소련은 1946년 3월 철군하기 시작하여 5월에 철수하였다. 그 사이 공산당군이 먼저 도착하여 중소 도시에서 무장을 강화했다. 국민당은 미군의 수송 지원을 통해 동북지역으로 군대를 이동시켰고, 1946년 3월에는 선양(瀋陽), 랴오양(遼陽), 창춘(長春) 등 주요 도시를 접수했다. 공산당의 홍군 역시 국민당군에 반격하기로 하였고, 동북지역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오랜 전투 끝에 1947년 후반부터 공산당은 선양과 창춘 등 일부 거점 도시를 제외하고 동북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동북지역은 공업 시설이 집중되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이 이 지역을 점령한 것은 이후 내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47년 초반까지는 절대적인 수적 우세에 있던 국민당군이 홍군을 상대로 몇 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고, 본래 공산당의 해방구였던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유격전을 벌이며 국민당군을 피로하게 하였고, 기존의 통치 지역을 버리고 더 넓은 지역, 특히 농촌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공산당 측은 점령지가 없더라도 국민당군을 궤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싸웠다. 항일전쟁시기 형성된 공산당과 농민 사이의 결속은 국공내전 시기에도 유지되어, 농민들은 공산당 유격대에게 협조하고, 국민당군이 진군할 때는 식량을 남기지 않고 도주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도왔다. 공산당이 통치하던 지역에서의 토지개혁을 통해 1억 명의 농민이 토지를 분배 받았고, 공산당원의 숫자도 270만 명으로, 10년 만에 100배 이상 증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토지를 분배받은 것을 계기로 각지에서 자원입대한 병사들도 많았다. 반면 국민당군대는 강제로 징병되었고 열악한 대우를 받았으며, 내부 파벌투쟁 등으로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고, 공산당은 이 점을 이용하였다.
주로 농촌에서 활동하다가 도시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한 공산당은 정치적 중간세력이나 기업가들, 심지어 지주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국민당에게 등 돌린 사람들에게 새로운 중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1948년 봄부터 홍군은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옌안(延安), 지난(齊南) 등의 도시를 점령했고, 동북지역에 남아 있던 국민당 거점들도 함락시켜 동북지방 전역을 장악했다. 1948년 9월에 이르자 중국 동부 해안의 주요 항구가 공산당의 영역이 되었다. 1948년 11월에서 1949년 1월까지 지속된 화이하이전투(淮海) 전투에서 공산당은 창장(長江)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굳혔고, 1949년 1월 스자좡(石家莊), 톈진(天津), 베이징(北京) 등 화북 지역이 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1949년 1월 장제스는 총통의 지위를 내놓고 공산당 측에 화의(和議)를 제의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토지개혁, 관료자본 몰수, 민주연합정부 수립 등의 조건을 내걸고 협상을 진행했다. 이 기간 국민당은 미국의 원조를 증가시켜 시간을 벌고자 했지만 미국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1949년 봄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공군과 국고를 옮겨 후방을 방어하는 동시에 도피할 준비를 시작했다. 결국 화의는 결렬되었고, 공산군은 창장을 건너 난징(南京), 우한(武漢), 상하이(上海) 등 국민정부에게 상징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을 점령했다. 국민정부는 충칭과 청두(成都) 등지로 수도를 옮기며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하였다. 많은 성에서 군인들이 국민당과 함께 싸우기보다 공산당에 투항하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다. 결국 1949년 12월, 국민당은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타이완으로 이동하며 국공내전은 일단락되었다.
1949년 여름, 중국에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한 예비위원회가 소집되었고, 1949년 9월 21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가 베이징에서 열흘간 개최되었다. 공산당을 비롯하여 무당파 및 민주당파 인사들과 각 지역 및 여러 단체의 대표 총 662명이 모여 회의를 진행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동강령(公同綱領: 헌법 제정 전까지의 임시 헌법)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을 선포함으로써 중국에는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타이완으로 옮겨간 중화민국 정부와의 갈등과 대결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중국 대륙에는 중일전쟁기 일본과 맞서 싸우며 한국의 독립을 지향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 중 한국독립당은 1946년 국민당군이 동북지역으로 진군할 때 동행하여 이 지역의 조선인들을 모아 세력을 키우고자 했다. 그러나 1947년 여름부터 공산당의 공세에 국민당군이 힘을 잃었고 결국 한국독립당은 1948년 2월 동북지역에서 철수했다. 중국공산당의 홍군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수행했던 조선 출신 사람들은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등의 부대에서 주로 활동했다. 동북지역의 항일 무장단체는 1945년 7월 말 일본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이들 중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과 동북지역에서 생활하던 조선인들 중에는 동북지방에서 국민당과 싸우며 중국의 공민권을 얻게 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1946년 7월 평양에는 중국공산당에 의해 ‘동북국판사처’가 조직되었다. ‘평양이민공사’라는 이름을 내걸고 1949년 2월까지 남포, 신의주, 만포, 나진 등 4곳에 사무처를 세웠다. 북한은 이 판사처를 통해 부상자에 대한 치료, 전략물자 보급 등의 방법으로 배후에서 중국공산당을 도왔다.
한편 1949년 1월 국민정부 총통에서 물러난 장제스는 한국과의 군사적 동맹과 미국의 지속적인 군사 지원을 원했다. 이에 1949년 8월 장제스는 개인자격으로 이승만과 진해에서 만나 동아시아에서 공동의 반공전선 구축을 논의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시기 「중미관계백서」(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장제스 정권은 부패와 무능으로 내전에서 패배했다고 밝히는 1,000여 쪽의 문서)를 발간하고 국민정부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장제스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