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상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대회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한반도는 해방되었다. 조선인들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찾아온 미·소 양국에 의한 분할통치는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 남과 북 지역에 각기 다른 체제를 지향하는 정부를 수립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조선인들 내부의 이념 갈등과 전 세계적 냉전의 심화 등으로 38선 분할 점령은 끝내 극복되지 못하였다. 1948년 8월 15일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이어서 북쪽에서는 9월 9일, 김일성을 내각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다. 38선 이북의 분단 정부 수립은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으로 인한 소련군의 진주, 소련군의 후원을 통한 사회주의자들의 득세, 상호합의 없이 이루어진 북측의 사회경제적 개혁 조치와 국가건설 준비 등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바로 건설한다는 것을 부인하고, 사회주의의 전(前) 단계로서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는 ‘인민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표방하였다. 그것은 북한의 국호에 흔적처럼 남아 있다.
소련군은 얄타회담에서 연합군과 합의한 대로 1945년 8월 9일 0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였다.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을 빠르게 무너뜨리며 8월 11일에 한반도 북부에 진입하여 21일에는 원산까지 점령했고, 24~25일에는 함흥과 평양을 점령하고 일본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소련군은 각 지역에 경무사령부를 설치하고 행정권 이양 절차를 시작했다. 처음에 소련군의 방침은 미군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의 기존 행정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나 곧 바뀌었다. 소련군 진주 초기 함흥을 점령한 소련군에게 조선인들(함경남도 사회주의자협의회, 함경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이 찾아와 ‘조선민족함남집행위원회’를 결성했음을 알리고 자신들에게 행정권을 이양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소련군이 이를 즉각 수락하여 일본과의 합의가 폐기되면서 38선 이북 전역의 조선인 자치조직들에 행정권이 이양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의 자치 조직은 한반도 전체에서 공통으로 출현한 것이었다. 해방 직후 서울의 여운형을 중심으로 구성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는 전국적인 지방 조직을 형성하였고 38선 이북에도 각 지역 건준 조직이 형성되었다. 미군과 달리 소련군은 이들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행정권을 이양하여 직접 통치하도록 하였다. 소련군이 ‘소군정’을 세우지 않은 이유는 친소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할 것이라는 현지 사정에 대한 평가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판단하에 추진된 그들의 점령 정책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45년 9월에 모스크바에서 현지 소련군에게 점령 정책의 기본 방침이 전달되었다. 소련군은 “북조선에서 모든 반일적 민주 정당 및 단체의 광범한 블록을 기초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력을 수립하는 것을 원조할 것”과 “소비에트적 질서를 도입하지 않을 것”을 원칙으로 하되, 다만 ‘친소적’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최우선에 두었다. 당시 소련이 가장 중시한 것은 자국에 대한 위협 가능성이었으므로 한반도가 소련을 침략할 수 있는 근거지가 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따라서 초반에 소련군은 사회주의 이념과는 거리가 먼 민족주의자 세력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평남 건준은 일제강점기부터 전 조선에 잘 알려진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다만 곧 소련의 정책에 따라 각 지역의 특색을 반영하여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일정한 비율에 맞춰 참여하는 지방 조직들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급진적인 사회주의화를 경계하면서 과도기적 성격을 가진 행정부가 구성되었다. 그 결과 각 지역의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간의 갈등도 있었으나 비교적 순조롭게 행정조직이 구성되었고, 기존 지방 조직들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어 공식적인 지방행정조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해방을 맞이하자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북한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보천보 전투와(1937) 홍치허 전투(1940)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김일성은 9월 19일 소련의 군함을 타고 원산에 도착했다.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홍치허 전투 이후 소련 극동 지역으로 후퇴하여 중국 공산당군과 함께 ‘동북항일연군교도려’(소련 극동전선군 제88독립보병여단)에 편입되어 활동하면서 소련과 신뢰를 쌓았다. 원산에 도착한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 군복을 입고 이북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을 만나 정보를 수집한 이후 평양으로 향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에서 북한 정치무대에 공식적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당시 33세의 젊은 김일성을 두고 ‘김일성 가짜설’이 퍼질 정도로 화두에 올랐다. 대중들이 상상했던 ‘백마 탄 노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를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던 독립투사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웠다. 소련 군복을 입고 입국한 김일성은 이북 정치지형의 변화를 예고한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1930년대부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했던 사회주의자들이 기지개를 켜고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서울의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은 미·소 양국에 의해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대응하여 정치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다만 미·소 양군의 주둔에 따라 남북이 서로 다른 정세 하에 있으므로 별도의 당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소련군과 38선 이북에 돌아온 김일성 등의 주장에 따라 1945년 10월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조직되었고 김일성이 12월에 북조선분국 제1책임비서가 되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이후 1946년 초에 “북조선공산당”으로 불리어지기 시작했고, 1946년 8월 (북)조선신민당과 합당하면서 북조선노동당이 되었다. 소련의 권유로 조선신민당과 합당하면서 전위적 성격을 가진 공산당에서 대중적 성격을 가진 노동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여 대중정당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후 북조선노동당은 1949년 6월에 남조선노동당과 합당하여 현재까지 이어지는 조선노동당이 되었다(합당 사실은 6·25전쟁 이후에야 공개됨).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다양한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만든 조직이었다. 우선 중국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중국 화북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운동에 종사하며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을 조직했던 사회주의자들로서 중국공산당의 주요 활동 지역명을 따라 ‘연안계’라고 통칭된다. 한글학자 출신의 김두봉, 중국공산당 ‘팔로군’에서 오랫동안 복무했던 무정(김무정),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다가 중국으로 탈출했던 최창익 등의 인사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당초 이들은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입국하고자 했지만 소련군에게 거부당했다. 이에 따라 김두봉을 비롯한 연안계 인사들은 1945년 12월에 개인적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조선독립동맹은 1946년 2월에 (북)조선신민당을 조직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의 결집을 추진하였다. 38선 이남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사회경제학자 백남운이 남조선신민당을 이끌게 되었다. 북조선신민당은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했다.
만주파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만주와 조·중 국경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사람들을 통칭한다. 이들은 보천보 전투 과정에서 양강도 갑산군에서 활동했던 무장투쟁세력과 연합하여 만주와 갑산지역에서 활동했던 세력의 연합체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만주파는 김일성, 동북항일연군 제7군 참모장이었던 최용건,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정치위원이었던 김책, 보천보 전투를 도운 갑산지역의 박금철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소련 극동전선군 제88독립보병여단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있었다. 만주파는 대체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했으며, 해방 초기 군사 분야에 주축을 이루면서 북한 현대사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소련군을 따라 들어온 조선인 중에 재소 고려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연해주 지역에 망명해 살던 조선인들의 후예들이었고 소련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 계층으로 ‘소련계’로 불렸다. 이들은 소련공산당에 의해 차출되었는데 지역 공산당 간부들도 있었으나 대체로 학교의 교원, 협동농장 관리인, 하급관료 등 평범한 지식인이었다. 차출된 사람들은 모스크바 근교에서 3~6개월간의 짧은 교육을 받고 북한에 파견되어 행정, 통역, 군대 등에서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허가이였다. 허가이는 우즈베키스탄 지역 공산당위원회 비서 출신으로 당 조직에 밝았다. 허가이는 소위 ‘당박사’로 불리며 당 조직, 운영에 깊게 관여하면서 정부 수립 초기 부수상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다. 소련계는 소련의 효과적인 북한 통치를 위해 파견된 사람들로서 지역과 상황에 맞게 인력을 배치한 사례였다.
이 외에도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당은 민족자본가, 도시 소자산가, 기독교인들을 기반으로 한 대중정당이었다. 조선민주당은 중도우익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소 양국이 합의한 정치적 후견제 문제에서(신탁통치) 반탁을 지지하면서 당이 와해되어 주요 인물들이 월남하였고, 당은 강량욱을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이로써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간의 균형적 협조관계는 종식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내외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자들은 38선 이북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자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해방 초기 다양한 주체들이 정당을 조직하고 정치활동을 전개했지만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들만 남게 되어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간의 연합체적 성격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양한 계파의 사회주의자들 간의 경합은 국가운영 노선 두고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소련의 ‘친소적’ 정부 구상은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하는 지형을 형성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 형태로 나타나는 혼합경제구조 형성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구조는 사회주의 체제의 전단계로서 완만한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의 토대를 건설하기 위한 단계였다. 1945년 5월 모스크바 소비에트 연방 과학아카데미 사회과학원은 소련의 향후 대외정책의 기조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에 있어 반봉건사회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과도기를 설정하고 인민민주주의를 적용하여 사회주의 갈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도록 하였다. 북한도 소련의 지도 아래 인민민주주의 시기를 거쳐 사회주의로 도약해야 했다. 민주개혁은 사회와 경제구조를 사회주의적으로 탈바꿈시키는 계기가 될 터였다.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시작으로 동년 5월 농업현물세에 관한 결정, 동년 6월 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노동법령, 동년 7월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 동년 8월 중요산업 국유화 법령이 공포되었다. 당시 행정부격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인민민주주의적 방향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토지개혁은 당시 인구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농민들의 염원을 담은 개혁이었다. 일제강점기 심화된 지주-소작제는 빈농층의 증가로 귀결되었고 농민들은 피폐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1946년 3월 5일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으로 각 농촌의 농촌위원회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첫 번째 몰수 대상은 일본 국가, 일본인, 일본인 단체의 소유지였다, 그 다음은 민족반역행위자, 월남민들의 토지, 그 다음은 5정보(약 1만 5천 평, 1정보는 약 3천평) 이상의 토지를 가진 사람(지주)들이었다. 토지개혁은 지주-소작제를 해체하는 데 역점을 둔 것이었으며, 경제관계를 통해 형성된 전통적 촌락사회를 해체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일시에 몰수된 토지는 농촌위원회에서 분배했는데 각 가정의 가족의 수와 노동력에 비례하여 점수를 산정하고 이를 합산하여 토지를 분배했다. 토지 분배는 비옥한 토지와 척박한 토지를 고려하여 분배면적을 달리하기도 했고, 여성 또한 노동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경제 인구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기존의 농촌사회구조를 해체하기 위해 토지를 몰수당한 대지주를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켜 기존의 소작농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지주들은 북한 사회에 남아 적응하기보다는 월남을 선택하였다. 그렇게 토지개혁은 약 한 달 만에 완료되어 북한 농민들은 모두 자작농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토지를 분배 받은 농민들은 정부, 즉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1946년 6월과 7월에 공포된 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노동법령과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은 남성과 여성의 평등성, 사회주의 국가에서 신성시하는 노동의 고결함을 강조하는 법령이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을 사회 전 분야에서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선언을 하면서 사회적 변화를 예고하였고, 일터에서도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신국가 건설’의 보조자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1946년 8월 중요산업 국유화 법령은 사회주의 공업화로 가는 과정에서 핵심 산업을 정부가 선점하여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였다. 정부가 직접 중화학공업 공장, 대규모 경공업공장을 운영하여 국가의 기초산업 토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토지개혁은 농민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하여 기존의 지주소작제를 자작농 체계로 바꿔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할 수 있는 밑거름 역할을 하게 했고,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 받은 농민들은 정부의 절대적인 지지층이 되었다. 중요산업시설 국유화는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를 닦을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면서 토지개혁과 함께 정부의 계획경제를 구상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남녀평등권, 노동법령이 공포되면서 남성과 여성의 평등성이 강조되어 가정과 사회의 변화가 촉발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다. 노동법령을 통해 사회주의가 강조하는 ‘신성한 노동’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사회주의 공업화로 가는 중요한 가치로써 활용되었다.
해방 이후 약 1년이 되지 않은 북한 사회에서 정부의 민주개혁은 인민민주주의적 경제구조를 형성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획득한 (임시)인민위원회는 정치적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주요 세원인 지세 확보와 대공장 운영 이익금을 확보하게 되면서 인민민주주의적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1946년이 시작되면서 북한은 차츰 하나의 정부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에서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수많은 노력들은 있었으나 그 효과는 미미했다. 민주적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소집된 미소공동위원회는 지지부진했고 남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의 활동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남북이 하나의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고, 신탁통치(후견제)는 그 다음 문제였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오보는 각 진영의 찬탁운동과 반탁 운동으로 격화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조선민주당의 조만식은 미·소의 5년간 후견제가 실제적인 신탁통치임을 주장하면서 반탁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김일성과 최용건의 설득에도 완강히 반대하자 소련과 만주파에 의해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미 1945년 11월 10개 행정국이 조직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된 것이었다. 이 위원회는 북한의 행정책임자들로 구성된 내각적 성격과 각 정당 대표가 참가하는 연합적(통일전선조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최고행정주권기관’이었고 입법권, 사법권까지 장악한 행정부로 명실상부한 국가 최고기관이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당면 과업을 제시한 이후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을 즉각 실시했고 동년 3월 23일에는 〈20개조 정강〉을 발표하여 국가건설노선을 보다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개혁을 실시하여 당시 사회를 인민민주주의적 사회로 탈바꿈시키고자 하였다.
1946년 상반기에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고 북한에서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족하여 정부의 형태를 갖춰나가면서 ‘임시’적 성격을 점차 벗겨내고 있었다. 신탁통치 문제의 발화로 남과 북 양측의 찬반이 오가는 사이 분단 정부 수립의 지향성은 짙어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계획을 발표하였다(정읍발언). 이를 계기로 남한에서도 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의 단계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을 중심으로 각 사회단체와 정당들을 하나의 통일전선으로 조직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각 정당과 사회단체가 모여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결성했고 이를 기초로 하여 최초의 선거를 치르고자 하였다. 이에 1946년 11월 3일부터 1947년 3월 5일까지 약 4개월간 각급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처음 실시되는 보통선거를 홍보하고 선거의 효율성을(투표율, 찬성률) 증대시키기 위해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 확대되었다. 선거는 보통선거로 실시되었지만, 한 명의 추천인을 두고 흑백함에 의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진행되어 반쪽짜리 선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함에 있어 인민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절차를 거친 인민위원회 선거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렇게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로 출범하게 되었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통일 정부 수립과 관련한 성과를 확인할 수 없었다. 북한은 소련과 함께 미·소 양군의 철수와 자주적 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미국이 적극 반대하면서 이 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이관했다. 유엔은 유엔 감시 하의 남북 총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하여 소련에 알렸으나 소련이 이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유엔 감시하 남북총선거는 무산되었다.
북한은 김구와 김규식이 제안했던 만남을 역제안하여 1948년 3월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약칭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남북연석회의의 예비회의는 1948년 4월 19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개최되었고 김구와 김규식이 참석하였다. 4월 26일 남북요인회담에서 총선거에 의한 통일국가를 수립할 것을 표명하기도 했지만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들의 의견차이를 좁힐 수 없게 되자 5월 초 김구를 비롯한 남한 인사들이 서울로 돌아갔다. 동년 5월 10일 이승만을 중심으로 남한에서 단독선거가 시행되면서 남북의 분단정부 수립이 가시화 되었다.
북한은 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남북한을 포함한 총선거를 8월 25일 실시했다. 북쪽에서는 선거를 축제와 비견하면서 원활히 진행하였다. 그러나 남한의 선거는 비밀 지하선거로 실시하여 남북에서 572명의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위원을 선출하였다. 북한은 형식적으로 남북한을 아우르는 한반도 전 지역에 선거를 실시했다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기초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북한은 남한보다 늦은 1948년 9월 9일 내각을 임명하고 정부수립을 선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게 되었다. 이미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공표하여 남한을 대표하는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렇게 1948년 8월과 9월 남과 북 모두 각자의 정부를 수립하면서 분단구조가 고착화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고, 냉전의 심화로 인한 상호 간의 경쟁은 남북 갈등의 주요 요소가 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