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 1970년
전태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48년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가난에 시달리며 끊임없는 이주와 노동에 나서야 했던 전태일은 평화시장 재단사로 근무하며 생활이 안정되던 때에 오히려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화시장 작업장 내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그 속에서 시달리는 어린 여공들의 상황을 개선하고자 다짐한 것이다. 전태일은 동료들을 모아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조사하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근로기준법이 노동 현장에 적용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실행했다. 하지만 성장주의가 팽배했던 당대 조건 속, 사업장 업주는 물론 노동 당국조차 전태일의 호소를 외면했다. 스물 두 살이던 전태일이 택한 마지막 투쟁 방법은 죽음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책을 품에 안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에 나선 것이다. 근로기준법이 존재함에도 준수되지 않던 비참한 노동 현실에 대한 고발이자 이를 개선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투쟁이었다. 전태일의 분신은 이전까지 노동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당대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노동자의 생존권을 비롯한 가난하고 평범한 이들의 권리와 존엄성을 일깨웠다.
전태일은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 슬하 2남 2녀 중의 장남으로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재봉 사업 부침에 따라 전태일과 그 가족은 대구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대구로, 그리고 다시 서울로 지속적인 이주를 감당해야 했다.
첫 서울행은 1953년 장마로 아버지의 부산 사업장이 물에 잠기고 집이 빚쟁이에게 넘어간 뒤였다. 어머니가 행상으로 뒷받침하며 다시금 시도했던 아버지의 봉제 사업은 1960년 재차 실패했다. 전태일 가족은 청계천 빈민가 천막촌에 살아야 했고, 연이은 사업 실패로 충격에 빠진 아버지의 폭음과 구타를 견뎌야 했다. 12세였던 전태일은 학교를 중퇴하고 동생 전태삼과 함께 생업 전선에 나섰다. 1961년, 13세 전태일은 첫 번째 가출을 감행했고, 남대문 인근에서 1년간 구두닦이, 신문팔이로 생활했다. 우여곡절 끝에 1962년에는 대구에서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고, 재기한 아버지를 도와 미싱 보조로 일했다. 1963년 5월, 15세의 전태일은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야간)에 입학했다. 고등공민학교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위한 사회교육 차원의 교육기관으로 정규 중학교 과정이 아니었으나, 이곳에 다닌 기간은 전태일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1963년 겨울 어려워진 가계 형편 때문에 더 이상 학교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1964년 초 전태일 가족은 대구 빈민가로 밀려났고, 어머니 이소선은 식모살이라도 하기 위해 홀로 서울로 떠났다. 16세의 전태일도 5세인 막내 전순덕을 데리고 다시금 서울로 향했다. 막막한 생계 앞에 동생을 아동보호소에 맡겨야 했던 전태일은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가릴 것 없이 일을 했다. 그 가운데 뒤따라 서울로 올라와 거리를 떠돌던 동생 전태삼과 상봉했고, 중앙시장에서 우거지를 주워 팔던 어머니까지 찾을 수 있었다. 이후 가족은 고된 노동의 결실로 남산동 50번지 판잣집에 사글세로 들어갔다. 이즈음 대구에서 아버지와 여동생 전순옥도 상경했고, 보육원에서 막내 전순덕도 데리고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전태일 가족은 1966년 초 남산동 판자촌 대규모 화재사건의 이재민이 되어 창동(현 쌍문동)으로 이주해야 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일하게 된 것은 1964년 봄 동대문에서 구두닦이를 하다가 ‘시다’(견습공) 모집 전단지를 본 이후였다. 이를 계기로 평화시장에서 시다 일을 시작했다. 대구에서 아버지의 미싱 보조로 익혔던 기술은 전태일의 빠른 승진을 도왔다. 1964년 겨울에 ‘미싱 보조’로 승진했고, 1966년 가을에는 통일사에 ‘미싱사’로 취직했다. 당시 평화시장은 사장이 재단사·재단보조에게 직접 월급을 주고, 미싱사는 객공(客工)으로 고정급여 없이 작업량만큼 돈을 받는 구조였다. 그리고 미싱사는 이 돈을 자기 산하 미싱보조와 시다에게 배분했다. 이러한 노동구조 하에서 전태일은 좀 더 안정적·주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재단사’가 되기 위해 ‘재단보조’로 전직했다. 그리고 1967년 2월 즈음 마침내 전태일은 재단사로 승진했다.
이렇듯 전태일은 가난한 가족사로 인해 여러 차례의 이주와 험난한 노동을 지속해야 했다. 하지만 전태일의 시선은 자신의 가난과 어려움에만 멈추지 않았다. 평화시장의 노동환경, 그리고 그 속에서 혹사당하고 있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에게 더 큰 관심을 돌린 것이다.
재단사로 재직하면서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문제를 인식하고 그 개선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전태일은 1969년 6월 말 평화시장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재단사들의 모임 ‘바보회’를 창립했다. ‘바보회’는 ‘지금은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당하고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 말자’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이를 위해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입하여 공부하면서 평화시장 노동실태에 대한 조사 작업을 진행하였다.
평화시장은 한국전쟁기 서울수복 직후부터 청계천 천변에 이북 피난민들이 자리 잡고 의류를 만들어 팔면서 시작되었다. 실향민들 간 평화를 염원하며 이름을 ‘평화시장’이라 붙였다고 하는데,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와 더불어 기존 판잣집 점포들이 철거되고 들어선 것이 길이 약 1킬로미터에 달하는 3층짜리 새로운 시장 건물이었다. 평화시장 외에도 주변 건물 건립은 이어져 통일시장, 동화시장 등이 들어섰다. 평화시장에는 다양한 기성복 제조 공장 및 점포가 밀집되었고, 1960년대 초부터 전국 최대 기성의류 도매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1970년 11월 13일 이후 평화시장은 일반인들에게조차 대표 의류 시장이라는 기존 이미지에 더하여 ‘전태일의 평화시장’이라는 지울 수 없는 또 하나의 얼굴을 갖게 됐다.
전태일이 세상에 고발하려 했던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노동조건을 살펴보자. 1970년 시점 전태일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평화시장과 근처 시장들을 합친 봉제 작업장 수는 약 800개이며 노동자는 2만여 명에 달했다. 대개 1층 의류 점포에 수직으로 이어진 2~3층이 봉제 공장이었는데, 규모와 고용인원은 제각각이었지만, 평균 6.7평의 공간에 29.4명의 종업원이 일하고 있었다. 이는 1인당 약 0.23평 넓이의 극도로 협소한 면적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노동이 가능했던 것은 작업장을 불법 구조변경했기 때문이었다. 평화시장 1칸 공장의 유독 높은 천장 구조를 활용하여 바닥과 천정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판자를 설치하여 이를 다락방 작업실로 사용했다. 이를 통해 사실상 2배의 면적을 확보할 수 있었다. 1.5~1.6미터 높이에 불과한 다락방 작업장 안에서 노동자들은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었다.
그 밖의 환경 역시 문제였다. 직물가공업 특성상 대량의 먼지가 쏟아졌으나, 환기장치나 통풍시설은 거의 없었다. 조명시설도 열악했다. 햇볕을 받으며 쉴 공간도 없었다. 물론 쉰다는 것 자체가 평화시장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동시간은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10시 30분까지, 하루 평균 14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고, 한 달 중 휴일은 매달 첫 주·셋째 주 일요일 단 이틀이었다. 성수기에는 휴일 없이 철야작업을 해야 했다. 반면 비성수기에는 휴업이 잦았고, 그만큼 임금을 받지 못했다. ‘경력 많은 이 치고 환자 아닌 이는 없다’는 말이 돌 정도로, 눈병, 위장병, 기관지 질환, 신경통이 많았다. 화장실 문제도 심각했다. 평화시장 2층에는 약 70개 작업장이 있는데, 남녀공용 화장실 변기는 3개뿐이었다. 한 작업장 내 노동자를 평균 20명으로 잡으면, 약 400명당 1개의 변기를 쓰는 셈이었다.
전태일은 저임금 또한 문제시했다. 특히 평균 15세의 여성들이 대다수인 ‘시다’의 경우는 한달에 1,700원에서 최대 3,000원을 받았다. 하루 수당 약 70원을 받고 14시간 이상 작업하는 셈이었다. 1969년도 경제기획원 통계에 따르면 한 사람의 도시 노동자가 월 1만6천94원의 임금을 받아야만 최저생활이 가능할 수 있었으나, 시다의 최고 월급 3천원은 최저생활 가능 임금액수의 1/5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노동조건은 평화시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태일 분신 후 노동청 조사에 따르면, 서울, 부산, 인천, 대전, 대구, 광주 등 6대 도시 27개 시장 상가의 피복제조업체 환경은 평화시장의 노동조건과 흡사했다.
전태일이 택한 저항의 방안은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에서 정리한 대로, 네 단계를 거치며 변화했다. 첫째는 그 자신이 봉제업체의 관리자인 재단사가 되어 어린 노동자들을 돌봐주는 것, 둘째는 노동실태를 설문 조사하여 그 결과를 ‘사회’에 호소하는 것. 세 번째 방안은 전태일 스스로 평화시장 안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 봉제업체를 직접 차려 운영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가 분신을 불사하는 필사적인 투쟁이었다.
하지만 노동조건을 개선하고자 했던 전태일의 초기 활동은 순탄하지 못했다. ‘바보회’를 바탕으로 한 노동실태 조사과정은 업주들에게 발각되었고, 전태일은 해고되고 ‘바보회’도 해체되었다. 전태일은 큰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곧 이를 딛고 일어섰다.
전태일이 노동조건 개선을 촉구하는 기본 근거로 삼았던 것은 근로기준법이었다. 근로기준법 문구 그대로의 엄격한 적용을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기존 14시간 노동을 10시~12시간 노동으로 단축하고, 매주 일요일만큼은 휴일로, 그리고 근로기준법 제94조에 해당하는 법률상 연 1회 이상의 건강진단 실시 등과 같은 매우 기본적인 사항만을 요구했다. 시다의 수당만이라도 50% 인상해 달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대 근로기준법은 상시 15인 이상 근로자 고용 사업장에만 적용받고 있었다. 이에 평화시장에서는 15인 이상 고용업체라도 인원을 그 이하로 신고했다. 물론 15인 이상 업체 역시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가운데 전태일은 두 번째 단계의 사회 ‘호소’ 방안과 같이 정부의 개혁 조치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노동실태를 고발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발송하였다. 전태일의 진정서는 1970년 10월 7일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소녀 등 2만여 명 혹사’라는 제목으로 경향신문 등에 기사화되기도 하였으나, 개선을 약속한 노동청의 실질 변화는 없었다. 사실상 제대로 노동행정을 펼칠 인력도 없었다. 1970년 현재 전국 배치된 근로감독관은 57명뿐이었고, 서울은 전체 10명이 3천162개 사업장을 담당 중이었다.
세 번째 방안, ‘모범’ 봉제업체 설립은 1968년 12월에 착상하여 1969년 4월부터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당시 전태일은 어린 노동자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면서도 봉제업체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음을 평화시장 내에서 증명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그가 구상한 ‘태일피복’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제품계통에서 근로자를 위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일”이었다. 아울러 노동자들을 위한 회사 내 각종 제도를 고안했다. 하지만 일생이 가난했던 전태일에게 사업체를 차릴 자본금은 전무했고, 계획은 끝내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앞선 계획들이 성과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전태일은 항의 방식을 바꾸었다. 호소나 진정을 통한 온건한 방식이 아닌, 적극적인 시위를 통한 투쟁이었다. 하지만 1970년 10월 20일부터 시도했던 시위는 여러 차례 불발로 끝났다. 그리고 전태일은 마지막 투쟁을 결심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을지로 6가 평화시장 앞길에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품에 안고 온몸에 휘발유를 뿌린 후 분신했다. 쓰러지기 전까지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 근로기준법이 존재함에도 준수되지 않던 비참한 노동 현실을 고발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병원에 옮겨진 후에도 전태일은 어머니와 동료들에게 자신이 못 다 이룬 일을 꼭 이루어 달라고 부탁했고, 어머니와 동료들은 그의 말에 그러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분신한 지 10시간 만에, 스물두 살에 불과했던 전태일은 눈을 감았다.
전태일의 분신은 경제성장 우선주의 기조 하에서 외면되어 왔던 당대 노동현장의 모순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드러냈다. 직전까지 평화시장의 실태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언론은 관련 기사를 쏟아냈고 단체들은 반응했다. 한국노총은 평화시장 내 비인도적 노무관리를 규탄한다는 성명서를 배포했다. 노동청은 평화시장 내 28개 사업주를 근로기준법 위반혐의로 입건했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 11월 27일에는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다. 이후 청계피복 노조는 전태일의 뜻을 이어가는 어머니 이소선과 동료들의 선도적 활동을 바탕으로, 1970년대 손꼽히는 민주노조로서 타사업장의 투쟁을 지원하고 외부 활동가들과 활발한 연계활동을 전개했다.
무엇보다 전태일의 분신은 이전까지 노동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상황에서 노동자의 생존권을 비롯하여 가난하고 평범한 이들의 권리와 존엄성을 부각시켰다. 전태일에 관한 대표적 저서인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에서 조영래는 전태일의 죽음은 가난과 질병과 무교육의 굴레 속에 묶인 버림받은 목숨들에게도,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먼지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 보고 하루 열여섯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공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인간선언’이었다고 평가했다.
전태일은 학생운동진영의 움직임도 이끌었다. 전태일의 장례식이 있던 1970년 11월 18일 서울대 상과대학생 200여 명이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연계시켜 추진해 나가기로 결의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였다. 1970년대 학생운동이 노동운동과 결합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후 노동문제에 관한 학생운동 진영의 관심은 확대되었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노동조합의 근로조건 개선 및 생존권 투쟁에 직간접적 연대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전태일은 1960년대 4.19혁명과 한일협상반대운동으로 상징되는 ‘민족·민주 운동’에서 1970년대 민중운동까지 포괄하는 ‘민족·민주·민중운동’으로 사회운동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다만 전태일은 노동운동의 대중적 상징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전태일은 ‘아름다운 청년’으로, 혹은 사회참여적 ‘기독청년’으로, 혹은 동시대 일반사람들의 경험을 대변하는 ‘이주민’으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이해하는 시도 역시 이어지고 있다. 그를 다룬 매체 역시 전태일 추도식과 노동상뿐만 아니라, 문학과 영화, 그리고 학술성과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확장되어 왔다. 그 누구보다 사람의 중요성을 알고, 약자를 존중하고 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행하고자 했던 전태일이었기에, 이를 되새기고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는 작업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