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철종 11)
동경대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아카이브
동학은 최제우(崔濟愚)가 1860년,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던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유·불·선(儒佛仙)을 포함한 모든 사상을 종합하여 한국적 관점에서 새롭게 창도한 사상이자 종교이다.
최제우는 1824년 10월 28일, 현재의 경상북도 월성군 견곡면 가정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경주 최씨이며, 본명은 복술(福述), 관명은 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黙), 호는 수운(水雲)이다. 이후 전국을 유랑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공부와 수도에 전념하던 35세 때, 스스로 이름을 제우(濟愚)로 고쳤다.
최제우는 10세 무렵, 자신이 서자의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과 사회제도의 모순을 깨달았다. 조선왕조 사회에서는 아무리 학문을 닦아도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는 신분의 한계를 자각하고 깊은 울분에 사로잡힌 그는 “효박(淆薄: 인정이나 풍속이 어지럽다)한 이 세상에 군불군(君不君) 신불신(臣不臣)과 부불부(父不父) 자불자(子不子)를 주소간(晝宵間: 밤낮으로) 탄식하니 울울한 그 회포는 흉중에 가득하되 아는 사람 전혀 없다”라는 가사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20세가 되던 해, 최제우는 부친의 삼년상(三年喪)을 마치자마자 활로를 찾고자 전국 유랑의 길에 나섰다. 그는 각지를 떠돌며 다양한 공부와 경험을 통해 자신을 정신적으로 구제해 줄 방법을 찾아나섰다. 고향을 떠난 지 11년이 지난 1854년, 31세가 된 그는 실의에 빠져 가족을 찾아 귀향하였다. 그러나 11년간의 유랑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구도(求道)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당시 조선 사회와 국가, 민중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통찰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이 찾는 활로와 도(道)는 기존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백성과 자신, 나아가 이 나라를 구제할 새로운 도를 창도할 것을 결심하였다.
19세기 조선은 정치적으로는 세도 정치와 과거제도의 문란으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었고, 사회경제적으로는 수취 체제의 문란과 지방 관리의 가혹한 수탈로 민중 봉기가 빈발하였다. 전염병의 유행과 자연재해는 민중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렸으며, 개혁을 시도하던 움직임은 동력을 잃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권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흐름 속에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아편전쟁 이후 서구 세력의 중국에 대한 침략과 조선 연안에 출몰하는 이양선은 조선 민중에게 커다란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시대적 위기 속에서 피지배층의 의식 변화가 일어났고, 민중들은 악화된 생활환경을 개선해 줄 것을 고을 수령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요구는 점차 조직화 되었으나, 대개 정감록(鄭鑑錄)이나 미륵불 사상 등에 기대어 봉기한 민란 수준에 머물렀다. 조직은 미비하고 이념은 체계적이지 않았으며,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은 시대적 조건 속에서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도되었다. 11년간 전국을 유랑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꼈고, 신비 체험과 수행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1860년 4월 5일 동학을 창도한 것이다.
동학은 조선 후기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던 민중의 성숙된 의식을 바탕으로 피지배층의 요구와 이해를 집약적으로 대변하며 탄생하였다. 이는 이중의 모순에 시달리던 조선 후기 민중들이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제시한 민중의 자기 확립 사상이었으며, 최제우는 이러한 민중 의식을 조직화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된다.
동학의 모든 사상적 요소는 최제우에 의해 정립되었다. 그는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祠)』를 저술하였으며, 이 두 경전은 그의 순교 이후 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의 구송(口誦)을 통해 전해지다 최시형에 의해 편찬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최제우는 새로운 도의 창도(創道)를 위하여 유교(儒敎), 특히 공자와 맹자의 고전 유학과 주자학(朱子學)을 비롯해 양명학(陽明學)까지 포괄하였다. 또한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흡수하고,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역학사상(易學思想),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단군신앙(檀君信仰), 귀신신앙(鬼神信仰), 영부신앙(靈符信仰), 정감록 사상(鄭鑑錄 思想), 샤머니즘 등 당시 농민층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던 다양한 민간신앙을 자신의 사상체계 속에 통합하였다. 심지어 서학(천주교)까지도 연구하여 자신의 도에 포함시켰다. 이처럼 최제우는 당시 자신이 접할 수 있었던 모든 동서양 사상을 새로운 도의 자원으로 활용하였다.
1)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
최제우는 인류 역사를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의 두 시기로 나누고, 두 시기 모두 개벽(開闢)으로 시작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개벽이란 우주와 세계가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며, 그 주기는 약 5만 년에 달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후천개벽은 인류 사회가 처음으로 겪는 대변혁으로, 천운(天運)이 돌고 시운(時運)이 도래할 때, 천명(天命)을 받은 자가 새로운 도(道)와 학(學)을 창도(創道)하고 포덕(布德)함으로써 시작된다. 즉 선천세계의 5만 년이 끝나고 후천세계로 넘어갈 시기가 도래하자, 말세의 혼돈과 도탄 속에 빠져 있던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하느님은 오랜 고민 끝에 구미산(龜尾山) 용담(龍潭)에서 수도 중이던 최제우를 선택하였으며, 하느님은 최제우에게 도를 전하고 가르쳐 포덕하게 하였고, 이로써 후천개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최제우가 하느님의 교시로 득도하여 창도한 동학은 동서고금에 없던 무극대도(無極大道)이며, 이 동학의 창도와 포덕이 바로 후천개벽의 시작인 동시에 앞으로 5만 년간 후천세계를 이끌 사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동학의 창도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천세계의 성쇠 이후 후천개벽이라는 순환의 흐름 속에서 천운, 시운, 운수가 맞물려 정해진 결과였다고 본다. 동학의 후천개벽 사상은 기존의 모든 도와 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의지를 담고 있어 정신세계의 혁명으로 평가된다.
2) 시천주(侍天主)의 한울님 사상
최제우는 『동경대전』의 「논학문(論學文)」에서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吾心卽汝心], 천심이 곧 인심[天心卽人心]’이라는 말과 『용담유사』의 「교훈가」에서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한단 말가’와 같은 표현을 통해 한울님과 인간이 본래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한울님이 초월적 존재로서 멀리 있는 신이 아니라, 인간 안에 모실 수 있는 내재적 존재임을 뜻한다.
모든 사람은 수행을 통해 한울님과 일체화할 수 있으며, 자기 안에 모셔진 한울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이 사상은 ‘시천주사상(侍天主思想)’으로 불린다. 동학의 핵심 사상인 시천주는 당시 반상(班常), 적서(嫡庶), 남녀(男女) 구분이 엄격한 봉건체제를 부정하며, 평등한 인간관을 토대로 한 반계급적 사상으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최제우에 의해 확립된 동학의 평등사상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실천적으로 계승되어 동학농민혁명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수심정기(修心正氣)라는 수행법을 통해 인간이 자기 안의 한울님을 체험하고 일체화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구체적인 방법으로 주문 수행과 성경신(誠敬信)의 자세를 강조하였다.
3) 척왜양(斥倭洋)의 민족사상
최제우는 자신이 창도한 사상을 ‘동학’이라 이름 지은 것은 당시 조선에 유입되던 서학(천주교)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검무와 검가 같은 의식을 통해 서양의 침투에 맞선 전투적 의지를 고취시키고, 일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척왜양 사상은 1890년대 보은 취회를 거쳐 척왜양 창의로 발전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반봉건·반침략 노선으로 이어졌다.
4) 유무상자(有無相資) 사상
최제우는 동학을 전파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에 대한 대응으로 약방문(藥方文)을 제시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성심껏 따르면 병이 낫는다고 하였고, 하늘로부터 받은 신령한 부적을 물에 타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 전파하였다. 또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제자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유무상자 사상은 동학 공동체의 연대와 결속을 강화시켰다. 이로 인해 최제우 사후에도 동학은 수십 년간 지하 조직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한편, 동학사상에는 정감록의 진인(眞人) 사상, 십승지(十勝地) 사상 등의 영향도 엿보인다. 이는 민중이 위기의 시대를 초월적 능력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염원을 반영하며, 동학이 민중에게서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동학은 창도 직후 조선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순식간에 경상도 일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동학 체제를 부정한 사상으로 규정한 조선 정부는 1863년 12월 최제우를 체포하고, 이듬해 3월 “평세에 난을 꿈꾸고, 어두운 곳에서 무리를 모았다(平世思亂, 暗地聚黨)”는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또한 그의 많은 제자들을 유배보냈으며, 이로 인해 동학은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최제우가 처형된 후, 동학교단의 실질적 지도자가 된 해월 최시형은 정부의 탄압을 피하면서도 동학 전파에 모든 역량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1860년대 말 동학은 주로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의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재건되었다. 이후 최시형은 강원도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 이곳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의 경전을 간행하고, 제의(祭儀)와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함으로써 동학교단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880년대 초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으로 조선의 정치 상황이 극심한 혼란에 빠지자, 정부는 동학과 동학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펼칠 여력이 없었다. 이 틈을 타 동학은 충청도로 전파되었고, 1880년대 중반에는 전라도까지 확산되었다. 1880년대를 기점으로 동학의 활동 중심지는 산간 지역에서 인구 밀집 지역이자 산업 중심지인 평야 지대로 옮겨가며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1880년대 중엽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각 고을의 수령과 아전, 토호(土豪)들은 정부의 동학 금지령을 빌미로 교도들의 재산을 수탈하였다. 이러한 수탈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가혹해졌다. 이에 대해 1890년대 이전까지 동학교도들은 체포되면 속전(贖錢: 일종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거나 체포를 피해 달아나는 등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응하였다. 동학교단 역시 유무상자의 정신에 따라 교도들로부터 속전을 거두어 도움을 주는 것 외에는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세가 급격히 확대되고 조직화가 진전된 데다 탄압과 수탈이 극심해지자, 동학교단은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움직임을 보였다. 이 시기부터는 확장된 교세를 바탕으로, 이른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라 불리는 동학 공인(公認) 운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동학 공인 운동의 경험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학은 조선왕조가 직면한 내부적 모순과 외세의 위협이라는 이중 과제 속에서 근대 민족국가 수립과 민중 구제라는 이념을 제시하였다. 또한 고난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민중에게 정신적 위안과 실질적 대안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동학의 사상적 특징과 조직, 그리고 동학 공인 운동의 경험 속에서 조선 후기 최대의 민중운동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