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고종 12)
강화 초지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운요호 사건이란 1875년(고종 12)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간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 초지진(草芝鎭)과 영종진(永宗鎭)에서 조선군과 교전한 사건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일본 정부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 조약)의 체결을 염두에 두고 계획적으로 일으킨 무력 도발로 간주한다. 그러나 일본 학계에서는 조선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우발적 충돌로 보거나 정한론자(征韓論者)였던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의 단독 행위로 치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2년에 일본에서 운요호 사건과 관련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조선과 일본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 질서 속에 포섭되어 있었다. 중화제국은 중국과 그 주변의 아시아 지역을 지배하는 제국을 자처했으며, 그 권력의 최상층에는 중국의 황제(천자)가 있었다.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 질서에서는 이러한 황제의 절대권력을 축으로 중국 역내(域內)에는 황제 아래 모든 백성이 평등하다는 이념을 담은 ‘제민지배체제(齊民支配體制)’를 구축하고, 중국 역외(域外)에는 조공책봉체제(朝貢冊封體制)를 수립하여 그 속에 포함된 나라들 사이의 단계와 서열을 구별하였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이러한 동아시아 세계 질서에 균열이 발생한 계기는 1839년부터 1842년에 걸쳐 청과 영국 사이에 발생한 아편전쟁(阿片戰爭)이었다. 아편전쟁은 내용상으로는 중국 내의 불법 아편 무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화이관(華夷觀)에 기초한 중국 중심의 계서(繼序, 수직적 질서)적 동아시아 세계 질서와 서양제국 중심의 ‘만국평등적’ 국제질서의 대립이자, 의례외교(儀禮外交)가 중심이 되는 중국의 조공제도와 통상(通商)이 중심이 되는 서구식 외교제도 사이의 충돌이었다. 청은 중국 시장의 지속적인 개방과 확장을 요구하는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1·2차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수도인 북경(北京)이 함락되는 결과에 직면하게 되었다. 서양제국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은 청은 1860년 영국·프랑스와 북경조약(北京條約)을 체결하면서 서구식 국제관계의 이념과 원칙에 입각한 근대식 외교통상 관계에 편입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나라였다. 일본의 개항은 1853년 미국 해군 제독 페리(Matthew C. Perry)가 함대를 이끌고 와 문호 개방을 요구한 것에서 기인했다. 그 결과 1854년 3월 말에 미국과 일본 사이의 화친조약이 체결되었고, 1858년 6월에는 양국 사이의 통상관계를 수립하는 미일통상조약이 조인되었다. 서양제국의 무력 앞에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200여 년간 지속된 쇄국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문호를 개방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는 양이론자(攘夷論者, 서양을 오랑캐로 지칭하며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 왕의 이름을 높이고 외세를 배격하자는 이론)을 기반으로 한 반막부(反幕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867년 말 도쿠가와 막부는 붕괴하고,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추진하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렇듯 19세기 중반 청과 일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양제국이 강요한 불평등조약 체제에 편입되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계 질서는 한동안 서양의 조약제도와 전통적인 조공제도가 병립하는 이원적인 질서로 유지되었다. 특히 동아시아 삼국(조선, 청, 일본) 상호 간의 관계는 여전히 전통적인 원칙과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전통적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조선을 서양 국제법에 기반한 외교통상 관계에 강제로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운요호 사건은 그 연장선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운요호 사건은 1875년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간 일본의 245톤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 등지에서 조선군과 교전한 사건을 일컫는다. 당시 운요호는 22일 오전, 남하하는 길에 영종도에 상륙해 성을 함락하고 각종 물자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운요호가 조선 영해에 접근한 것은 이때만이 아니었다.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기 4개월 전, 1875년 5월 25일에 일본 해군 소좌(少佐) 이노우에 요시카 함장이 운요호를 이끌고 예고도 없이 부산에 입항했고, 6월 12일에는 또 다른 한 척의 배(第二丁卯)가 부산에 입항하기도 했다. 운요호 사건 몇 개월 전부터 이미 일본 군함은 조선 주변 바다의 정형(情形, 사물의 정세와 형편)을 살피고 부산항에 정박하는 등 조선과의 교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3일 간의 교전을 마친 운요호는 9월 28일에 나가사키(長崎)로 귀항하였고,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는 사건의 경위에 관해 쓴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했다. 10월 8일, 일본 해군성은 이노우에의 보고서를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다. 이에 따른 운요호 사건의 경위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운요호는 9월 중 나가사키에서 출항하여 조선의 서남해안에서 청의 우장(牛莊)까지의 항로를 탐색하던 도중 마실 물이 떨어져 이를 구하기 위해 정박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운요호는 강화도에 정박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운요호가 갖고 있던 해안 지도는 병인, 신미양요를 계기로 작성된 것으로 강화도 연안만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운요호는 9월 19일 인천부 제물포의 월미도(月尾島) 앞에 정박했다가 다음 날인 9월 20일 아침에 한강 지류의 항산도(頂山島)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 주변의 수로(水路)는 지도에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함장 이노우에는 작은 보트를 내려 주변을 살피던 도중 우연히 강화부 초지진을 발견하고는 그곳에서 물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보트가 초지진 남쪽에 있는 포대에 접근하자 조선 측에서 갑자기 선제 포격을 실시했다. 포격을 받은 보트에서 신호탄을 쏘아 올려 본함(本艦)에 위급한 상항을 알리자 운요호는 군함의 돛대 끝과 깃대에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대포를 쏘아 맞대응을 시작하였다. 초지진에서의 교전은 조선군과 일본군 모두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로 정오 무렵 종료되었다.
운요호는 곧이어 오후 2시 30분경 제물포 해안의 영종진을 습격하여 35명의 조선인 사망자를 냈고, 포로 16명을 붙잡았으며 38대의 대포를 빼앗은 뒤 영종진의 공공건물과 민가를 불태웠다. 그 후 운요호는 주변에 위치한 물류도(勿溜島)에서 필요한 물을 얻어 나가사키로 향하는 귀항 길에 올랐다. 결론적으로, 10월 8일에 공표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 모든 전투는 9월 20일 하루 동안 발생했으며, 운요호는 교전 당시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고, 급수를 목적으로 강화도에 정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날조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 자료를 토대로 운요호 사건의 시말(始末)을 구성하긴 하였으나 그 내용의 정확성에 계속 의문을 제기할 만큼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예컨대 『근대일선관계의 연구』를 쓴 역사학자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는, 이 보고서에 적힌 일시(日時)와 지명에 부정확한 점이 많고 단 하루 동안에 초지진, 영종진 두 곳에서 연이어 전투를 수행하고 물류도에서 급수까지 마친 것이 의심스럽다는 논평을 남기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이 보고서의 날조 사실이 판명된 계기는, 2002년에 일본 방위연구소 자료실에서 운요호 사건과 관련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된 것이었다. 이 자료는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가 나가사키에 귀항한 다음 날인 1875년 9월 29일에 상부 보고용으로 작성한 최초 보고서였다. 그렇다면 왜 일본 해군성은 날조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발표하였을까. 그리고 그 배후에는 누가 있었을까.
함장 이노우에는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지 약 50년 뒤인 1924년 5월 22일, 일본해군대학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보고서가 날조된 배경이 될 만한 단서를 이야기했다. 그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육지로부터 3해리 바깥이라면 공해(公海)이지만, 그 이내 특히 강 안으로 들어가 3일이나 있었다고 한다면 타국 영해에 들어가서 전쟁을 한 것이 되며, 국제공법상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는 의견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3해리 이내는 영해라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국제공법에 탄수(炭水)가 떨어졌을 때는 임시로 어느 곳의 항만으로 들어가더라도 지장이 없다는 내용도 있으므로, 지금은 물을 찾아갔기 때문에 별로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井上良馨 談, 「井上元帥談話要領」, 『明治天皇紀』 제5권, 吉川弘文館, 1968에 수록(김종학, 「조일수호조규는 포함외교의 산물이었는가」, 『역사비평』114, 2016, 29쪽에서 재인용)
이노우에의 말에 따르면, 당시 운요호가 조선군을 대상으로 벌인 3일 간의 전투는 조선의 영해를 침범하는 국제법적 위법이었다. 일본 정부는 운요호의 군사 행위가 국제법상 용납할 수 없는 도발 행위로 비난받을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에 걸쳐 벌어진 사건이 10월 8일자 보고서에서는 9월 20일 하루 동안의 교전 사태로 축소되었다. 조선 병합의 전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국제법상 절차가 합법적이었다는 점을 매우 강조했다는 것을 상기해 볼 때, 운요호 사건 당시에도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신이 실추되는 것을 막고 조선이 국제법에 무지한 나라라는 인식을 퍼뜨리기 위해 보고서의 날조를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존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보고서 날조의 배후에는 일본 외무성 관리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와 조선의 초대 통감이기도 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김종학, 「조일수호조규는 포함외교의 산물이었는가」, 『역사비평』114, 2016; 김흥수, 「운요호사건과 이토 히로부미」, 『한일관계사연구』33, 2009.]
그렇다면 이노우에가 9월 29일에 작성한 최초 보고서에 따른 운요호 사건의 개요는 어떠했고, 10월 8일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우선 최초 보고서는 사건 전날까지의 일은 요약하여 서술하였고, 사건 발생 당일부터 3일간은 날짜와 시분(時分)까지 상세하게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운요호가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날짜는 9월 12일이었으며, 사건 전날인 9월 19일에 이미 영종진의 존재도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20일의 기록에 따르면 운요호의 강화도 접근 사유는 물을 구하는 것이 아닌 해안 측량 및 제반 사항을 탐색하고, 조선 관리를 면회하여 탐문을 하고자 함이었다.운요호는 국기를 게양하지 않고 강화도 해안에 접근하여 동정을 살피다가 이를 적군으로 인식한 초지진의 포대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운요호가 일본 국기를 게양한 것은 21일의 일이었다. 이날은 운요호가 초지진을 재공격한 날이기도 했다. 운요호 병사들은 정오 무렵 전투가 끝나고 난 뒤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 2시 40분에 조선군 병력 배치가 없던 제2포대에 상륙하여 불을 질렀다. 다음 날인 22일에는 눈여겨 보아두던 영종진을 기습하여 보복전을 펼친 뒤 9월 24일 나가사키로 향했다. 결론적으로 10월 8일 보고서의 세 가지 주요 내용(9월 20일 하루 동안의 교전, 교전 시작 당시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다는 점, 강화도 정박의 목적은 급수)는 모두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876년 2월, 일본 정부는 운요호 사건 때와 비슷하게 7척의 일본 선단을 이끌고 해군력을 과시하면서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요구하였다. 이렇듯 강대국이 함포사격으로 위력을 과시하며 상대국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외교방식을 함포외교(艦砲外交)라고 한다. 1853년 미국 해군 제독 페리가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던 방식이기도 했다. 일본은 강화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포함외교 방식을 모방하여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였다. 이렇듯 운요호 사건은 조일수호조규의 체결을 성공시키기 위한 일본의 사전 작업이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