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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대홍수

이촌동에 살던 조선인들이 떠나야 했던 이유

1925년

을축년대홍수 대표 이미지

1925년 7월 20일 오후 12시 30분경 한강철교 부근의 항공사진

국립중앙도서관

1 개요

1925년에 일어난 이른바 “을축년대홍수”는 ‘20세기 한반도 최악의 홍수’라 불릴 정도의 재해로, 근래 100여 년간 일어난 수해(水害) 중에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큰 규모였다. 광의로는 1925년 여름 한반도 주요 하천에서 발생한 대홍수를 뜻하며, 당시 7~9월에 걸쳐 총 4차례 물난리를 말한다. 그중에서 협의의 을축년대홍수는 1925년 7월 2차례에 걸쳐 수위 10m 이상을 기록하며 최소 4만여 명의 이재민을 냈던 한강 인근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한강 이북 일부) 일대의 홍수를 가리킨다.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구역을 흘러가는 한강 인근 지역은 수재에 취약한 곳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홍수는 거의 연례행사였다. 하지만 홍수 대비책은 언제나 미비했고, 주민들의 피해는 반복되었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차별적 제방 축조로 이촌동 일대 조선인 빈민들은 보금자리를 잃고 자기 의사에 관계없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2 한강 일대 홍수의 연례화와 치수 사업 부진

재해란 외부 요인으로서 재난에 의해 인명, 재산이 피해를 입거나 일상생활이 지장을 받는 경우를 말한다. 자연재해[天災]와 인위재해[人災]로 분류된다. 그중 자연재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재해대책은 특정 사회를 지배하는 지배권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한 방편이었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치적으로 치수사업을 꼽는 것처럼, 전근대 시기 군주와 왕조가 맡아야 하는 사업이었고, 이것은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근대 지배권력을 자임했던 조선총독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자연재해 중 가장 빈번하며 두렵게 여겨지던 것은 가뭄[旱害]과 수해였다. 그중에 수해는 인명과 재산 피해를 모두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수해는 호우로 인한 홍수로 일어난다. 한반도의 지리 및 기후 조건 특성상 하계에 강수량이 집중되어 있어, 장마와 홍수는 연례행사였다. 1928년에 나온 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한반도의 하천 유역 중 가장 비가 많이 오는 곳은 섬진강 유역, 청천강 유역, 강원도 동해안, 한강 중류였다. 그중에 한강을 보면, 중류의 1년 강우량은 평균 1,200mm이었고, 6~8월에 57.3%가 집중되었다. 여름에만 약 690mm의 비가 내렸던 것이다.

한강 중류의 강우량은 지금도 100년 전과 비슷하다. 그러나 100년 전의 한강과 지금의 한강은 다르다. 폭우가 홍수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그간 물을 다스리고 홍수를 막기 위한 토목사업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강은 현재 치수사업으로 정비되어 있다. 주요 치수사업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1985년 충주댐이 건설되어서 한강의 수위 차이(하상계수 = 최대유량/최소유량, 필자 주)가 약 4.3배 감소했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는 한강종합개발계획이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모래밭이던 한강 유역이 정비되고 오늘날 콘크리트 형태의 한강공원이 조성되었다. 겨우 30여년 전에야 한강 일대의 수해 공포가 줄어든 것이다.

반면 100년 전 한강은 홍수를 연례행사로 맞이했다. 예컨대 1865~1927년 구(舊) 용산(龍山) 방면(현재의 원효로2가 일대)에서 조사된 연도별 한강의 최고 수위를 보자. 19세기 말 약 10~11m, 1911년과 1914~1924년에는 거의 매년 약 8.4~10.8m를 기록했다. 1917년(약 5.9m), 1921년(약 7.5m) 정도만 예외였다. 이 정도의 수위 상승은 바로 수해로 이어졌으며,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매년 홍수를 겪고 있었다. 1928년에 일본의 토목학 잡지에 실린 연구에 의하면, “경성, 용산, 마포 부근은 수위가 6, 7m 상승하면 바로 가옥이 침수되는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상습 침수지대가 있었다. 신용산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이촌동이었다. 이곳은 한강 인도교가 끝나는 모래벌 옆이었다. 거주자 대부분이 군사기지이자 철도회사가 있는 신용산 인근으로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들이었다. 이촌동은 대홍수 직후인 1925년 10월에도 조선인 비율이 93%였다. 1923년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촌동은 약 500호, 3,500명이 사는 노동촌(勞動村)이었다. 200호가 있는 동부, 40호가 사는 중부, 그리고 약 300호가 사는 서부 이촌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서부 이촌동 주민의 대다수는 용산역 옆에 있는 남만주철도㈜(‘만철’, 1925년 이후 조선철도가 만철 위탁경영에서 총독부 철도국 경영으로 이전) 회사 철도공장의 노동자들이었다. 즉, 이촌동의 조선인들은 군사도시로 형성된 신용산 지역에 새로 유입된 이들이었다. 철도 노동자, 뗏목 만드는 톱질꾼, 모래를 파서 나르는 일꾼 등이 많았다. 1922년에도 이들의 집은 약 반수가 떠내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일자리 때문에 보금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의 수해를 막고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대책을 세우고자 하였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거주지 보호를 목적으로 구용산 만초천[蔓草川 - 당시 욱천(旭川)] 제방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홍수는 이어졌다. 1920년 8월 홍수로 이촌동, 마포, 뚝섬, 영등포, 종로, 남촌 일대가 모두 수해를 입었다. 신용산의 경의선, 경원선 2개 철도의 철로도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역시 일본 정부의 긴축재정 강조로 인하여 토목사업을 크게 벌일 수 없었다. 1921~1922년 구용산, 1923~1925년 신용산 방수 공사가 조금씩 진행되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을 위한 재해대책은 없었다. 이촌동은 군사기지와 철도를 보호하기 위한 신용산 제방에서 벗어나 있었다. 1923~1925년 이촌동의 조선인들은 경성부협의회(오늘날의 서울시의회와 유사한 자문기구)와 주민운동을 활용해 경성부와 조선총독부에 제방 축조를 요구했다. 한강에 가까운 이촌동 제방이 신용산 제방보다 높이가 낮으면 민족차별을 선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와 경성부는 예산 부족을 거론하며 제방 축조를 미루었다. 1925년 6월 경성부는 어차피 장마철이 되면 무너질 것이라면서 다시 공사를 미루었다. 조선인 보호는 뒷전이었다. 예견된 참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3 1925년 초유의 대홍수와 이재민 최소 4만여 명 발생

1925년 7월에 “을축년대홍수”가 일어났다. 경성에는 7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그리고 특히 16~18일의 3일간 집중호우가 내렸다. 경성 기준 강우량은 7월 전체 832.9mm, 9~11일 387.3mm, 15~19일 590.9mm였다. 앞서 1928년 조사에서 한강 중류의 여름 3달 평균 강우량이 690mm라고 했다. 1925년 7월 1달 동안의 강우량이 기존 6~8월 3개월 간의 평균 강우량을 훌쩍 뛰어넘었다. 또한 2022년 한국에 상륙했던 태풍 힌남노의 서울 최대 1일 강우량이 120mm(2022년 9월 5일, 동작구 기상청 기준)였으니, 1925년의 강우량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전체에서 1925년 홍수로 인한 총 피해액은 약 1억 322만 원이었다. 1916~1924년 매년 총 피해액이 평균 2천만 원이었으므로 평소의 약 5배였다. 또한 실질적인 ‘조선총독부 중앙재정’이었던 조선총독부특별회계 1925년 예산액의 59.5%에 달했다. 이 중 경기도 피해액은 약 40%(약 4,166만 원), 한강의 피해액은 약 45%(약 4,625만 원)이었던 것이다.

한강 기준 피해는 집계된 것만 익사 404명, 범람면적 586㎢, 가옥 피해 약 3만 동(유실 5천 동, 붕괴 7천 동, 침수 1만 8천 동)이었다. 이재민 숫자는 7월 25일까지 조선총독부 경무국 발표 기준 경기도 41,403명이었다. “을축년대홍수”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한강 연안과 경성부를 떠올리게 되는 이유였다.

그중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여진 것이 경성부 일대의 한강 연안 마을들이었다. 2차례 집중호우로 한강 연안 마을들은 쑥대밭이 되었다. 1925년 7월 18일 「경성부 수재도」를 보면 , 뚝섬, 이촌동, 신용산, 구용산, 영등포, 잠실, 송파 일대가 완전히 범람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강 수위가 구용산 기준으로 매년 최대 8~10m까지 올라갔지만, 2번째 집중호우가 내렸던 1925년 7월 18일에는 약 12.7m로 폭증했다. 비가 잦아들었던 7월 20일 정오 즈음의 항공사진에서도 한강인도교 중심부가 완전히 잠겨 있다(본 항목 대표사진).

용산 일대의 피해도 심각했다. 7월 28일 『동아일보』는 용산경찰서 조사에 따르면 용산 관내 이재민이 32,500명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언급한 「경성부 수재도」를 보면, 경의선, 경원선 철도가 지나는 신용산 일대까지 모두 잠겼다. 용산경찰서 관내에서 가장 피해가 많은 동리(洞里)는 이촌동이었다. 동부 이촌동에서 406호가 유실되었고, 서부 이촌동에서 80호가 유실, 102호가 완전 파괴되었다. 조선인 마을이 쑥대밭이 된 것이다. 홍수가 지나간 이후의 경성을 취재한 일본인의 보도에 의하면, 이촌동 일대의 강폭이 3배로 늘었다. 또한 “피난자가 돌아왔으며 가재를 정리하는 남편 옆에서 망연자실해서 울고 있는 아내가 있어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했다”고 말했다. 경기도 중에서도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경성부, 그 중 용산 일대에서 이재민이 가장 많이 발생했던 것이다.

수해와 관련하여 일본인과 조선인들의 반응은 달랐다. 1925~1926년 경에 조선총독부 및 그 하부 행정기구, 그리고 일본인들이 출간한 책들은 모두 구체적인 피해 상황보다 군대, 청년단, 유지집단의 용감한 구호 활동에 주목했다. 반면 조선인들은 조선총독부의 소극적인 구제책을 비난하였다. 천도교 계열 잡지 『개벽』에서는 경찰과 군대에 그리 감사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오히려 조선인들이 조직한 조선기근구제회, 동아·조선·시대일보의 3대 조선어 민간지, 각 지역의 조선인 청년단과 소년단들에게 큰 감사를 표한다고 했다.

조선인은 식민지에서 구호 활동도 마음대로 하기 어려웠다. 조선총독부는 사회주의 계열 서울청년회의 구제 활동과 수재강연회를 금지했다. 경기도 시흥군청은 조선기근구제회 회원의 활동을 강제로 막았다. 전라북도 군산청년회의 이촌동 주민 실태에 대한 폭로도 막혔다.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가 7월 22일 사설에서 조선인이 주로 한강 강변, 섬, 웅덩이, 분지에 거주하여 피해가 막심하다고 보도하자, 신문 전량을 압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렇다면 조선총독부, 경성부는 1925년 홍수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이촌동 조선인 주민들에게 이후 어떻게 대처했을까?

4 최대 피해지역 이촌동의 조선인 빈민 이주 조치

수해가 지나간 이후 한강의 재해 재발 방지 대책은 총독부 직할하천 공사와 궁민구제토목사업의 2개 갈래로 진행되었다. 직할하천 공사는 조선총독부특별회계를 통해 직접 집행되는 일종의 치수사업이었다. 한강 공사는 총독부 긴축재정에도 불구하고, 1926년 직할하천 공사 중 유일하게 착공되어 1937년까지 진행되었다. 신용산, 구용산, 영등포, 뚝섬, 마포, 김포 일대가 대상이 되었는데, 일본인 집중 거주지역인 신용산과 구용산, 영등포 공사가 먼저 시행되었다. 다른 하나는 1931~1934년 궁민구제토목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이 사업은 식민지 조선에서 공황 당시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고용하여 일으킨 토목사업이었다. 이를 매개로 김포, 일산, 안양천 일대를 정비하였다. 다만 궁민구제토목사업을 통한 한강 치수사업은 농작물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용이한 선박 운행 목적이 강했다.

그렇다면 이촌동에 살던 조선인 주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답부터 말하면, 그들은 거주지를 떠났다. 대신 한강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도화동으로 이주했다. 이 조치는 2번째 수해가 끝나가던 7월 21일 총독부 구호반 회의에서 총독부 정무총감 이하 각 국장의 토의 끝에 정해진 것이었다. 정해진 내용은 첫째, 용산 제방의 5~10척(1.7~3.3m) 증축, 둘째, 용산 제방 바깥 이촌동 그 외 거주의 금지와 기존 주민들의 이전지 결정[(소위 ‘폐동(廢洞) 결정’], 셋째, 뚝섬, 노량진 수원지 방수시설 건설, 넷째, 이재민 구제, 다섯째, 피해 ‘공공’시설 복구에 관한 건이었다. 또한 1925년 8월 13일 조선총독부 관료와 경성 거주 재조일본인 중심 기구인 경성도시계획연구회는 총회를 열고 한강의 근본적 치수와 응급방수시설을 위해 이촌동 거주 금지를 총독부에 건의했다.

17년 뒤인 1942년 경성제국대학 위생조사부는 『토막민의 생활·위생』에서 경성부 빈민에 대한 사회대책의 출발점이 을축년대홍수라고 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와 경성부는 1925년 완전히 홍수에 휩쓸린 동부, 중부 이촌동 주민을 노량진 본동(本洞)으로 이주시켰다. 문제는 서부 이촌동이었다. 총독부는 서부 이촌동 주민들과 마찰이 일어 1930년 현 마포구 도화동 이전을 결정했지만, 목표인 280호 이주민 중 실제로는 절반만이 이주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서부 이촌동은 동부, 중부와 달리 가옥이 완파되지 않았다. 그리고 용산 철도국의 잡일꾼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직장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안전하게 거주하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총독부는 주민들과의 협의도 없이 폐동(廢洞)을 결정했다. 그러자 서부 이촌동 주민들은 동부, 중부 이촌동과 달리 노량진 이주를 거부하면서 제방 구축을 요구했다. 그리고 결국 한강 치수계획에서 소외되자 1930년 총독부와 충돌했던 것이다. 총독부는 오늘날의 마포구 도화동으로 이들의 이전을 결정했다. 그렇지만 출퇴근 거리가 멀고 감옥 공장과 유곽 등 ‘혐오시설’이 많은 도화동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들도 많았다.

“을축년대홍수”는 해방 후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홍수’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1925년의 피해가 유독 돋보였을 뿐, 그 이전에도 홍수 피해는 누적되고 있었다. 1925년 홍수 당시 식민지 조선의 ‘수부(首府)’라고 불리던 경성부의 피해가 가장 컸다. 그러자 그 이후 시행된 한강 치수계획은 용산과 영등포, 뚝섬과 마포 순으로 진행되었다. 일본인 집주지와 철도·군사기지 중심의 치수계획을 엿볼 수 있다. 반면 용산 근처에 잡일꾼으로 일하던 이촌동 조선인 주민들은 제방 수축의 수혜를 입을 수 없었으며, 총독부에 재해대책을 요구하다가 결국 보금자리를 잃고 대다수가 쫓겨났다. 자연재해는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다. 그러나 재해대책은 식민정책의 우선순위를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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