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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오입개헌 [四捨五入改憲]

영구 집권을 위한 이승만 정권의 헌법 개정

1954년

사사오입개헌 대표 이미지

부결된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한 최순주 국회부의장에 항의하며 국회 단상으로 뛰어올라간 이철승 의원

위키백과

1 개요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은 1954년 제3대 국회에서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위헌 통과시킨 사건이다. 1952년의 발췌개헌에 이은 두 번째 개헌이었다. 헌법개정의 주요 목적은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 집권이었다. 당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었는데, 이 제한을 초대 대통령, 즉 이승만 1인에 한해서만 적용하지 않는 것이 사사오입개헌의 핵심이었다. 헌법 개정에는 국회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인 135.333……명 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하였고, 이 개헌안에 대해 찬성 135표가 나와 부결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틀 후 여당인 자유당과 정부에서는 사사오입의 논리를 주장하며 개헌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했다. 위헌이자 무효가 되어야 하는 개헌이었다.

2 사사오입개헌의 배경

1952년 7월 4일 국회에서 통과된 발췌개헌안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였던 대통령직선제와 국회 양원제가 포함되었으나, 약 2주 후, 이승만은 또 한 번의 헌법 개정을 언급하였다. 7월 17일 제4회 제헌절 경축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에 여러 가지 조정할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다음 달에 있을 정부통령선거를 마친 후에 헌법개정위원을 조직해서 개헌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개정할 헌법안의 내용을 직접 발표했다. 국민투표제와 대통령 탄핵·파면시 유권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도록 할 것, 국회의원 소환제 등등이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헌법 개정의 핵심은 무엇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연장에 있었다.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었다. 1948년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이승만은 1952년의 발췌개헌을 통한 직선제로 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따라서 1956년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면 더 이상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은 1954년 5·20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당을 압승시켜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을 추진하려 했다. 따라서 1954년 초부터 이승만과 자유당의 적극적인 개헌 준비가 시작되었다. 헌법개정안의 내용은 1954년 3월 중순부터 보도되고 있었다. 요지는 초대 대통령의 종신 집정, 국민에게 국정에 대한 발의권 부여, 선거민에게 양원 의원에 대한 소환권 부여, 헌법 개정 및 국체 변혁에 관한 중대 문제의 국민투표, 정부에게 민의원 해산권 부여 등이었다.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1954년 5월 20일에 있었던 제3대 총선의 결과가 매우 중요했다. 이 선거에서는 각 정당에서 한 선거구에 한 후보를 공천하는 정당 공천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여당인 자유당의 공천은 개헌에 대한 동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4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 조건부로 입후보케 하라”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즉 개헌 지지의 다짐을 받고 자유당 후보로 입후보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자유당의 공천 후보자들은 “1. 본당 총재 각하의 지시와 당 정책을 절대로 복종할 것. 1. 민의원이 된 후에는 민의(民意)에 의한 당 결정의 개헌을 절대로 지지함.”이라고 쓰여 있는 서약서에 찬성 날인을 해야 했다.

5·20총선에서는 부정행위가 많았다. 이 선거는 ‘곤봉 선거’라고 불릴 만큼 경찰력을 동원한 부정이 심했다. 입후보 과정과 선거운동 과정에서 특히 문제가 많았다. 그 결과 선거는 자유당이 압승하였다. 득표율은 무소속 47.9%, 자유당 36.8%, 민국당 7.9%였으나, 국회 203석 가운데 자유당은 114석을 차지했다. 제1야당인 민국당은 겨우 15석을 획득했다. 개헌을 위해서는 136석이 필요했는데, 자유당은 개헌선 확보를 위해 무소속 의원을 끌어들여 1954년 6월 중순에는 드디어 136명을 채웠다. 그 과정에서 무소속 국회의원에게 여러 가지 방식의 협박이 가해졌다.

3 사사오입개헌의 내용과 과정

개헌은 5·20총선을 전후하여 점차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1954년 4월 19일에는 자유당과 민중자결단, 국민회 등의 보조단체들을 중심으로 ‘개헌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자유당에서는 임철호, 이범녕, 이선근이 대표로 파견되었다. 개헌추진위원회의 개헌안 골자는 ‘①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되 재선에 의해 1차 중임할 수 있다. 단 초대 대통령은 차한(此限)에 부재한다. ②헌법 개정 및 국가구성요소의 변혁은 유권국민 3분의 2 이상의 결의 없이는 할 수 없다. ③선거민에게 양원 의원에 대한 소환권을 부여한다. ④정부에게 민의원에 대한 해산권을 부여한다. ⑤헌법 제6장 경제조항을 개정한다.’ 등이었다.

1954년 7월 16일 자유당 간부들과 정부 관계당국자들로 구성된 헌법개정기초위원회에서는 개헌안 조문 정리를 완료했다. 개헌안 조문에 대한 당과 정부 간의 갈등이 있었고, 그 결과 국회의원 소환제를 삭제하고 개별 국무위원에 대한 불신임권을 포함하는 개헌 초안이 만들어졌다. 최종적으로 성안된 개헌안을 국회에 정식 제의하기 위해 찬동서명 날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1954년 9월 6일 136의원의 찬동 서명으로 개헌안이 국회에 정식 제의되었고, 9월 8일 정부에서 개헌안을 공고하였다. 이어서 11월 18일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되었고, ‘헌법 개정 제의 이유와 요지 설명서’가 배포되었다.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주권의 제한이나 영토의 변경 등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사항에 대하여 국민투표 실시
2. 국무총리제를 삭제하고 국무원의 연대책임제를 폐지하며, 국무위원에 대한 민의원의 개별적 불신임권 부여
3. 참의원에 대법관 등 법률에 의해 지정된 공무원 임명 인준권 부여
4. 경제체제의 중점을 국유·국영의 원칙으로부터 사유·사영의 원칙으로 이전
5.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잔임 기간 중 재임
6. 현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철폐

개헌안 공고 기간 동안 야당은 반대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무소속동지회와 민국당은 개헌반대 성명을 발표하며 반대운동에 나섰다. 민국당은 개헌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민국당 내 극우세력이 신익희 당수를 모함하기 위해 일으킨 ‘뉴델리 밀회설’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변했다. 신익희 국회의장이 1953년 5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에 참여하고 귀국하던 중 인도 뉴델리에서 북한의 조소앙을 만나 남북협상 문제를 밀담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무근임이 밝혀졌으나 야당의 결집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개헌안의 표결은 일괄표결, 비밀투표, 암호투표 등의 요구로 인해 혼란을 겪다가 결국 11월 27일 비밀투표에 붙여졌다. 표결 결과는 재석 202인에 가(可) 135표, 부(否) 60표, 기권 7표가 나와서 1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개헌을 위해서는 재적 의원 203명의 3분의 2 이상, 즉 135.333……명 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136명의 찬성표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날 국회 사회자였던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개헌안의 부결을 선포했다.

그러나 다음날 자유당과 정부는 ‘수학적’으로 ‘사사오입’을 설명하면서 개헌안 통과를 주장했다.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이 될 수 없으므로 반이 안 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 근거였다. 11월 29일 국회를 시작하면서 최순주 부의장은 이틀 전의 헌법개정안 통과 부결 발표는 ‘계산상 착오’였기 때문에 ‘취소’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헌법개정안은 가결 통과되었다고 선포했다. 이때 이철승 의원이 의장석에 등단하여 최순주를 잡아끌면서 “내려와”라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야당 의원이 모두 퇴장한 가운데 개헌안 ‘부결 번복 가결동의안’이 통과되었다. 유순식 의원 외 19인이 “현 재적의원의 3분의 2는 135명이며 따라서 135명의 찬성투표로써 개헌안은 가결되는 것이다.”라는 동의(動議)를 했고, 거수표결로써 가결되었다.

4 개헌의 결과

사사오입개헌으로 국무총리제가 폐지되어 대통령중심제가 강화되었고, 헌법의 경제 조항이 자유주의 경제 체제로 대폭 수정되었다. 대통령 궐위 식에 부통령이 승계한다는 것도 명시되었다. 무엇보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 것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는 위헌 무효의 헌법 개정이었다.

이승만은 1대(1948~1952년 : 간선제), 2대(1952~1956년 : 직선제), 3대(1956~1960년 : 초대 대통령 중임제 철폐) 대통령을 역임했는데, 1960년 대통령선거까지 포함하여 선출하는 과정마다 파란의 연속이었다. 사사오입개헌 역시 그 과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위헌이자 무효인 개헌으로 인해 이승만은 독재자로서의 이미지가 점차 공식화되고 ‘반민주’의 상징이 되어 갔다.

사사오입개헌으로 이승만은 1956년의 세 번째 대통령선거와 1960년의 네 번째 대통령선거까지 출마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사사오입개헌으로 영구 집권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개헌은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결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위헌적 개헌에 대한 불만을 계기로 자유당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야당 의원들은 범야당 연합전선을 통해 투쟁하기 위해 1954년 11월 30일 호헌동지회라는 원내 교섭단체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야당 세력의 결집은 민주당과 진보당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노골적인 독재의 시작으로 야당 세력이 힘을 얻게 되었고,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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