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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朝鮮軍]

한반도에 주둔했던 일제 침략군

미상

조선군 대표 이미지

두만강에서 도하훈련 중인 일본 육군 19사단 공병대와 포병대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조선군(朝鮮軍)은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일컫는다. 조선 주둔 일본군, 한반도 주둔 일본군이라고 지칭하며 일제 침략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조선군은 일제가 식민지와 점령지역에 제국주의 정책을 전개하기 위해 편성한 총군(總軍)이었다. 조선군과 유사한 위계를 갖는 총군으로는 관동군(關東軍), 대만군(臺灣軍) 등이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군은 1875년 운요호(雲揚號) 사건을 기점으로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여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03년 말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하여 한국주차대사령부가 한성에 만들어졌으며 개전 직후인 1904년 초에는 한국주차군과 한국주차군사령부가 편성되었다. 한국주차군은 일제가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강제 병탄함에 따라 조선주차군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주차(駐箚)’는 일본 열도에 본부를 둔 부대가 2년을 주기로 교대 주둔하는 형식을 말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1918년 한반도에 상주사단(常駐師團)이 편성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한반도 주둔 일본군은 조선군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했다. 조선군은 1945년 2월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방면군(方面軍) 체제로 다시 개편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패전을 맞았다.

이와 같이 일본군은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여러 차례 명칭을 변경했는데 가장 오랜 기간 ‘조선군’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까닭에 이 명칭을 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조선시대 군대와 혼동할 가능성이 있어 ‘한반도 주둔 일본군’으로 명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본군은 한국 병탄 이전까지는 한반도를 무력 점령한 채 항일운동을 탄압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내 치안 유지와 대륙 침략이라는 두 가지 임무를 담당하였다. 요컨대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화, 대륙 침략을 담당했던 제국주의 일본의 대표적 총군이었다.

2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과 주둔

제국주의 일본군이 조선을 처음 침략한 것은 1875년 운요호 사건 때였다. 당시 운요호에는 일본군 해병대(海兵隊)가 탑승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강화도와 영종도를 공격하여 유린한 장본인이자 처음으로 한반도를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 군대였다. 이후 일본군은 조선 내 변란이 있을 때마다 개입하여 침략적 입지를 넓혀 갔다.

일제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조선인들의 일본 공사관 파괴와 공사관부 무관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 살해를 빌미로 공사관수비대 주둔을 공식화하는 데 성공했다. 2년 뒤인 1884년에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이 이 공사관수비대의 군사력을 과신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일도 벌어졌다.

청과 일본은 갑신정변 직후 텐진조약을 맺어 조선에서 ‘변란’이 발생해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다른 쪽에 통보할 것을 약속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종이 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에 병력을 요청하자 이를 빌미로 일본군 역시 인천에 상륙했다. 머지않아 일본군은 경복궁 공격을 시작으로 청나라와 전쟁에 돌입한다. 그리고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오랜 중화주의 질서를 붕괴시키고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침략적 행보를 넓혀 갔다. 특히 한반도 곳곳에 수비대 명목의 부대를 다수 주둔시켰는데 이는 1896년 5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 Weber)와 일본 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사이에 체결된 4개조 각서(베베르-고무라 각서)에 따른 조치였다.

1904년 2월 시작한 러일전쟁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군사 지배가 한층 강화되는 사건이었다. 일본은 개전과 함께 규슈(九州) 고쿠라(小倉)에 사령부를 둔 제12사단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임시파견대를 편성한 뒤 인천에 침투시켰다. 이들은 곧바로 한성을 점령한 후 대한제국 정부에게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했다. 한일의정서 제4조는 일본군의 군사 활동과 점령을 임의 규정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전시 동원과 군사 지배를 사실화시킨 조항이었다. 한일의정서 체결 직후인 3월 도쿄에서 한국주차군사령부와 예속부대가 편성되었고 4월 초에는 한성에 설치되었다. 주목할 점은 개전 전인 1903년 12월 이미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통할할 한국주차대사령부가 한성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한국주차군사령부는 한국주차대사령부가 확대 개편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주차군은 편성 당시 각지의 수비대를 비롯하여 병참감부 및 사령부, 철도감부, 전신대, 헌병대, 주차병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병력을 동원하여 러일전쟁기 치안 유지와 병참 업무를 수행했으며 전후에는 의병 탄압과 한국 병탄을 주도했다. 한국 병탄 이후 일제가 한반도의 명칭을 ‘조선’으로 바꾸자 한국주차군과 한국주차군사령부 역시 조선주차군, 조선주차군사령부로 변경하였다.

3 한반도 상주사단 설치와 역할

조선주차군은 일본 열도에서 2년을 주기로 교차 파견되었던 2개 사단이 주축이었다. 이렇듯 교차 파견 형식을 취한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를 기반으로 한 상주사단 설치에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상주사단 창설은 1910년부터 제기되어 왔으나 실행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랐던 탓에 정작 사단 창설이 결정된 것은 몇 해가 더 지나서였다.

1915년 한반도 내 2개 사단 상설증치안이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제19사단과 제20사단이 각각 함경북도 나남과 경성 용산에 설치되게 되었다. 용산은 러일전쟁 직후 편성된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이미 들어서 있던 지역으로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심장부였고, 나남은 러시아와의 교전에 대응하기 위해 계획된 군사도시였다.

한반도 내 일본군 상주사단 설치는 1916년부터 1921년까지 만 5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상주사단 중 먼저 제19사단이 1916년 4월 설치를 시작하여 1919년 2월 편성을 완료하였다. 제20사단은 1919년 4월 군무를 개시했고 1921년 4월에는 전체 편제가 완성되었다. 이렇듯 상주사단 설치에 시차가 존재했던 탓에 제20사단이 활동을 시작하는 1919년 4월까지 경성에는 제19사단이 주둔하면서 한반도 내 치안을 담당하기도 했다.

상주사단이 점차 완성됨에 따라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명칭도 변경되었다. 애초 교차 파견을 뜻하는 ‘주차’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으나 상주화가 일단락되는 1918년 5월 ‘주차’가 탈락된 조선군, 조선군사령부가 정식 명칭이 되었다.

완성된 상주사단은 각각 2개의 여단과 4개의 보병연대를 기간으로 했다. 나남의 제19사단 예하에는 제37·38여단이 편제되었고 여단 예하에는 제73·74·75·76 보병연대가 편성되었다. 용산 제20사단에는 제39여단과 제40여단 예하에 제77·78·79·80 보병연대가 편성되었다. 보병연대별 사령부 소재지는 다음과 같다.

         부대  사령부 소재지 
 제19사단 
 (나남)
 제37여단   보병 제73연대   함경북도 나남 
 보병 제74연대   함경남도 함흥 
 제38여단   보병 제75연대   함경북도 회령 
 보병 제76연대   함경북도 나남 
 제20사단 
 (용산)
 제39여단   보병 제77연대   평안남도 평양 
 보병 제78연대   경성부 용산 
 제40여단   보병 제79연대   경성부 용산 
 보병 제80연대   경상북도 대구 

상주사단은 사령부가 설치된 지역을 중심으로 위수지역(衛戍地域)을 달리했으며 맡은 임무도 상이했다. 제19사단의 경우 주로 함경남북도를 위수지역으로 하면서 러시아(소련)에 대한 방어와 대응을 맡았다. 제20사단은 함경남북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을 위수지역으로 했고 중국 내 무력 침략에 적극 가담했다. 인구가 희소한 함경도 외의 지역을 위수지역으로 했던 까닭에 사실상 한반도 내 치안 유지와 식민 지배를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4 일제의 침략전쟁과 조선군의 대륙 침략

한반도 주둔 일본군은 상주화 이후 지속적으로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감행했다. 1920년대는 간도지역의 항일 독립운동 탄압을 위해 자행한 경신참변을 비롯하여 시베리아 혁명 간섭전쟁, 중국 혁명을 방해하기 위한 무력 침략(이른바 산동출병) 등이 있었다.

1930년대 이후 무력 침략은 더욱 확대되었다. 1931년 루거우차오(柳條溝) 사건으로 촉발된 만주 침략(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기 조선군은 그 침략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특히 중일전쟁 직후인 7월 11일 제20사단에 응급동원령이 하달되자 사단장이었던 가와기시 분자부로(川岸文三郞)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철로로 국경을 넘어 본격적인 침략을 단행했다. 7월 28일 난위안(南苑) 전투를 시작으로 베이핑(北平)과 한커우(漢口)를 잇는 철도선(平漢線)을 따라 남하하며 침략을 지속해 나갔다. 11월에는 타이위안(太原) 공격에 가담하고 이듬해인 1938년 2월 링스시엔(靈石縣)을 지나 3월에는 황하 인근의 푸저우(蒲州)까지 점령했다. 제20사단은 이후 시안(西安) 인접 지역까지 침공해 들어가 주둔하면서 해당 지역의 경비를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제20사단의 역할을 둘러싸고 여러 문제점들이 불거져 나왔다. 한반도 내 지속적인 치안 공백도 지적되었다. 결국 일본군 중앙은 제20사단의 복귀를 결정하고 1939년 11월 제20사단 병력에 대한 동원령을 해제했다.

제19사단의 경우 중일전쟁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1938년 7월 훈춘(琿春)에 인접한 소련과 만주 국경지역에서 이른바 ‘장고봉(張鼓峰) 사건’이 발생하자 예하 제73연대를 주력으로 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바 있다. 그러나 제19사단은 당시 월등히 우세한 공군력을 앞세운 소련 극동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패배를 거듭하다가 결국 9월 11일 정전협정을 맺고 원 주둔지로 퇴각하였다.

5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군사 동원

1941년 12월 일본군이 동남아시아와 하와이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초기 미 태평양함대에 큰 타격을 입히고 동남아시아 일대를 석권하면서 전황은 일본에 유리하게 흐르는 듯했다. 그러나 1942년 미드웨이 해전, 1943년 과달카날 전투 등 주요한 전투의 잇따른 패배는 전쟁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일제의 영역이었던 중부태평양제도(남양군도)는 물론이고 뉴기니와 동남아시아 전역이 차례로 연합군의 공격에 무너져 내렸다.

조선군은 1943년 이후 악화된 ‘남방’의 전선으로 동원되었다. 중국과 소련 등 대륙을 향한 군대였던 조선군 주력이 대거 남쪽을 향해 이동했다. 가장 먼저 제20사단이 1943년 1월 동원되어 부산을 거쳐 동부 뉴기니로 이동했다. 제19사단은 1944년 11월 동원되어 필리핀 전선에 투입되었다.

한편 전쟁 말기 악화된 전황에 따라 신규 사단이 다수 편성되었다. 앞서 두 개의 상주사단에 이어 평안도 일대를 위수지역으로 하는 제30사단이 1943년 5월 만들어졌고, 1944년 2월에는 경성에 사령부를 둔 제49사단이 편성되었다. 제30사단은 1944년 5월 필리핀 전선으로, 제49사단은 미얀마로 이동했다. 제19사단과 제20사단을 비롯하여 1944년까지 한반도에서 편성되었던 사단들은 침략전쟁의 최전선에 동원된 이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들 사단의 사망률은 80~90%에 달한다.

일제가 침략을 통해 확장했던 전선은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거품처럼 줄어들었다. 특히 태평양 일대의 전선은 급격히 위축되어 1944년에는 일본 열도 전역이 미군의 공습에 노출되었고 1945년 초에는 대규모 상륙작전이 가시화되었다. 일제는 연합군의 공세를 막기 위한 최후 결전을 계획했다.

1945년 2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수뇌부들은 연합군을 상대로 한 ‘본토결전(本土決戰)’ 계획을 수립했다. 본토결전은 마지막 순간까지 최후의 1인까지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강요한 것인데 일제강점기 내내 ‘외지’였던 한반도까지 작전 지역에 포함하고 있었다. 한반도는 ‘결7호 작전’의 대상 지역이었는데 제주도와 남서해안 일대에는 아직도 최후 결전을 위해 구축한 일제의 지하 군사시설이 수없이 확인된다.

본토결전에 따라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편제가 다시 변화한다. 조선군은 제17방면군으로, 조선군사령부는 제17방면군사령부로 변경되었으며 동원과 병참, 교육 훈련을 수행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官區司令部)도 신설되었다. 전투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조선군을 작전을 전담하는 방면군과 군정을 전담할 군관구로 개편한 것이었다.

제19사단과 제20사단 등 주력 사단을 상실한 제17방면군은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급히 새로운 사단을 편성했다. 주로 한반도 남부 지역에 주둔했는데 제120사단, 제150사단, 제160사단, 제320사단 등이 있다. 제주도에는 제58군이 설치되었고 예하에 제96사단, 제111사단, 제122사단 등을 두었다.

한반도 주둔 일본군에 편성되었던 사단에는 강제동원된 조선인 청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육군의 부대 명부인 『유수명부(留守名簿)』에는 동원된 조선인들의 면면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예를 들어 제19사단과 제20사단에는 각각 약 2,000명의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되어 있었다. 조선인 청년들은 일본군 부대의 이동에 따라 전선에 배치되었는데 전황이 악화되고 패전을 거듭하면서 수많은 피해를 입었다. 예컨대 동부 뉴기니로 이동했던 제20사단 내 조선인들의 경우 사망률이 무려 84%에 이른다.

한반도 주둔 일본군은 가장 먼저 한반도에 침략해 들어왔다가 제일 마지막까지 한국인들의 자유를 억압했던 존재였다. 한반도의 영토를 유린하고 우리의 주권을 강탈하는데 앞장선 주축이었으며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수많은 조선인들을 사지로 내몬 일제의 중추였다. 지금도 서울 용산에서부터 제주도 해안 끝자락까지 한반도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전쟁유적이 수없이 많이 남아 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군의 만행을 증명하는 유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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