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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寺內正毅]

조선을 일제 식민통치의 감옥으로 만든 장본인

1852년 ~ 1919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대표 이미지

데라우치 총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마지막 한국통감이면서 동시에 첫 번째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제3대 한국통감과 초대 조선총독을 연이어 맡은 인물이다. 그는 마지막 한국통감이자 동시에 첫 번째 조선총독이었던 셈이다. 그는 한국병합이라는 과제를 완수했으며 일제 식민통치의 기틀을 세웠으므로 이른바 대일본제국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시각에서 보면 조선 전체를 일제의 감옥으로 만든 원흉이었다.

2 군과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거물

1910년 5월 한국통감으로 임명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데라우치는 1825년 야마구치현에서 하급 사무라이인 우타다 쇼스케[宇田多正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외가로 양자로 가면서 데라우치(寺內)의 씨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하급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난 만큼 어린 나이에 번내의 무장단체인 다지히타이(多治比隊)에 입대하였다. 메이지유신 당시 막부파와 반막부파 사이에 벌어진 보신전쟁(戊辰戰爭)에 반막부파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후 건설된 일본 육군의 소위로 임관됨으로써 그의 군인으로서의 경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정한론 소동의 와중에 벌어진 세이난전쟁(西南戰爭)에도 참전하였지만 심각한 상처를 입는 바람에 오른팔이 영영 불구가 되었다. 그래서 이후 부득이 야전보다는 후방에서 지원하는 보직을 주로 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이후 일본 군부에서 승승장구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 교육총감, 육군참모차장 등 핵심적인 보직을 역임하였다. 1901년에 육군대신에 처음 기용된 이래 1910년 한국통감에 임명되기 이전까지 외무대신, 남만주철도설립위원장 등 정부의 요직도 두루 거친 거물이었다.

3 첫 번째 과제는 한국병합

데라우치는 1910년 5월 30일 제3대 한국통감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한국에 부임하지 않았다. 상당 기간 부임을 늦추고 도쿄에 머물렀다. 그가 7월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에 부임하였다. 그는 한국통감으로 임명된 후 약 2개월 정도 부임을 늦춘 셈이었다. 그가 이렇게 임지인 한국으로 부임하는 것을 늦춘 것은 한국병합이라는 특별한 과제를 부여받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에 부임하기 전에 한국병합을 실행하기 위한 마스타플랜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일본 육군에 한국병합 실행을 위한 방안 마련을 지시하였지만, 곧바로 범정부 차원에서 준비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내각의 동의하에 병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병합준비위원회의 의장은 시바타 가몬(柴田家門) 내각 서기관장이 맡았고 주임은 구라치 데츠키치 외무성 정무국장과 고마치 미도리 통감부 외사과장이 함께 맡았다. 병합준비위원회는 여러 차례의 회의 끝에 병합을 위한 실행계획을 수립하였고 이는 일본 내각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확정되었다.

데라우치는 이렇게 병합준비위원회를 통해 한국 병합을 위한 마스타플랜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한국에 주둔 중인 일본군 참모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를 도쿄로 불러들여 헌병대장으로 직접 임명하면서 사전에 한국의 치안을 확보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는 이렇게 한국병합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에 비로소 한국에 부임하였다. 그리고 지방에서 의병을 토벌하던 일본군을 서울로 불러올려 삼엄한 계엄 상태를 조성한 상태에서 순종으로 하여금 한국병합조약에 도장을 찍도록 강요하였다. 이로써 데라우치는 한국병합이라고 하는 첫 번째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4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에 임명된 이유

일제는 한국병합의 임무를 완수한 데라우치를 연이어 초대 조선총독에 임명하였다. 그는 1916년까지 조선총독의 자리에 있었다. 일제는 조선을 차지한 후 조선에 대한 통치를 맡긴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에게 조선을 맡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그의 출신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데라우치는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야마구치현 지역은 과거에는 조슈(長州)번이 다스리던 곳이었다. 조슈번은 오늘날 가고시마현에 해당하는 사쓰마(薩摩)번과 함께 반막부파의 핵심으로써 메이지유신의 주역이었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 이후 번벌을 형성하여 정치권력을 독점하였으며 군부에서도 야마가타 아리모토가 이끄는 조슈 군벌이 일본 육군을 장악하였다. 데라우치가 오른팔을 쓰지 못하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육군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도 조슈 군벌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1910년대 당시 조선총독은 명목상 일본천황이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본 군부에서 임명하였다. 따라서 당시 조선은 일본 군부의 식민지였으며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조슈 군벌의 식민지였다. 이것이 바로 하필이면 조슈번 출신인 데라우치가 조선총독에 임명된 이유이다. 초대 한국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도 그와 마찬가지로 조슈번 출신이었다.

5 무단통치의 체제를 구축하다

조선이 실제로는 일본 군부의 식민지이고 데라우치는 일본군부가 임명한 만큼 그의 조선에 대한 통치방식도 군사적이고 강압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통치방식을 당시 무력으로 단호하게 통치한다는 뜻에서 무단통치라고 불렀다.

당시 조선총독은 조선 통치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였다. 입법권과 사법권 그리고 행정권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었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도 조선총독이 마음껏 동원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일본의 내각과 총리의 지시를 받을 의무도 없었다. 당시 조선총독의 신분이 현역 육군대장이었던 만큼 데라우치는 군사독재를 행했다고 할 수 있다.

데라우치가 권력을 행사하는 구체적인 방법도 매우 폭압적이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헌병경찰제를 들 수 있다. 헌병경찰제는 일반 경찰이 아니라 군대의 경찰인 헌병이 치안을 유지하는 제도이다. 헌병이 일반 경찰의 직책을 겸하면서 민간인을 단속하고 처벌하였다. 일반 경찰이 아니라 헌병이 단속하고 처벌하는 만큼 그 방법은 매우 거칠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헌병경찰은 그 자체가 식민지배의 폭력성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렇게 폭압적인 헌병경찰제가 시행된 만큼 조선인의 정치적 자유가 침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은 물론이고 언론과 집회 및 결사 등 아주 낮은 수준의 정치적 자유조차도 데라우치의 통치 아래에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무단통치는 교육의 영역에까지 관철되어 데라우치의 시대에는 학교 교사들까지도 교실에 칼을 차고 들어올 정도였다. 일제는 자기 나라에서는 신체형을 전근대적이란 이유로 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에게만은 유독 태형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폭압적인 무단통치 체제를 구축한 인물이 바로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였다.

6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

데라우치라고 하면 곧바로 105인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사건은 1908년 결성되어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비밀결사인 신민회 세력에 대해 일제가 대대적인 탄압을 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10년 12월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던 안명근이 체포되면서 비롯되었다. 안명근은 하얼빈에서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의 사촌동생으로서 신민회의 회원이 아니었음에도 일제는 황해도 일대 신민회 회원들을 그의 배후로 몰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이후 사건을 계속 확대하여 서울과 서북지역 일대의 신민회 회원들까지 모두 잡아들인 다음 이들에게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음모하였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1910년 12월에 열린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데라우치 총독이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신민회 회원들이 이 기회를 노려 총독 이하 요인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것이 사건의 요지였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600여 명의 조선인 지도층을 체포하여 온갖 고문을 가하였으며 이들 가운데 122명을 재판에 회부하였고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이유로 이 사건을 105인 사건이라고 부른다. 붙잡혀 들어간 피의자들은 모두 법정에서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모의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을 일제가 날조한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당시 신민회 회원들은 물론이고 대다수 조선인이 데라우치마저도 그의 고향 선배인 이토 히로부미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처단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신민회 회원들이 실제로는 데라우치 처단을 모의한 사실이 있었지만 사법적 처벌을 피하고자 법정에서 이를 부인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역사의 법정에서는 처벌을 피하고자 사실을 부인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당시 신민회 회원들이 실제로 데라우치 처단을 도모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없지 않다. 이렇게 데라우치는 1910년대 조선 사람들의 원한에 찬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7 조선에서 하던 대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다

데라우치는 1916년 10월 14일 조선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로부터 닷새만인 10월 19일에 제18대 일본 총리에 취임하였다. 일본에서 천황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이었다. 조선총독이라고 하는 자리가 당시 일본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총독을 거쳐서 일본의 총리가 된 사람은 데라우치 이외에도 몇 사람 더 있었다.

데라우치는 일본의 총리가 된 이후 팽창주의에 입각한 대외정책과 함께 그가 조선에서 행한 무단통치의 방식을 일본 내정에도 그대로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입헌정치의 원칙을 무시하는 강권통치를 종종 행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반혁명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원정 단행하였다. 그가 무리하게 추진한 시베리아출병이 실익은 별로 없고 경제적 부담만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이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높아졌다. 그러자 그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이를 억압하였다. 우선 신문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였으며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 50개에 대해서는 판금조치를 취했다.

데라우치가 팽창주의적인 정책을 편 까닭에 국내에서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이에 틈타 일부 상인들이 매점매석하는 등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서민들의 생활고는 가중되었다. 시장에서는 돈을 주고도 쌀을 구할 수 없게 되는 바람에 이른바 쌀소동이란 이름의 폭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퍼지기까지 하였다. 데라우치는 쌀소동에 대해 강경 일변도로 대처하였다. 군대를 출동하여 폭력적으로 강제 진압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시중의 여론이 매우 악화되어 데라우치는 1918년 9월 29일 총리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임한 지 1년만인 1919년 11월 폭군이라는 오명만을 남긴 채 쓸쓸히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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