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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동 고분군 [釜山 福泉洞 古墳群]

최고의 갑주(갑옷과 투구)를 소유한 집단

미상

부산 복천동 고분군 대표 이미지

부산 복천동 고분군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위치한 마안산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구릉 일대에 분포하는 유적으로 사적 제273호이다. 복천동 고분군의 남쪽으로 약 800m 떨어진 곳에는 동래패총이 있고 남쪽으로 1.8㎞ 떨어진 곳에는 연산동 고분군이 있다.

1969년 택지개발공사로 우연히 발견되어 긴급조사를 진행한 이후 수차례의 시굴과 발굴조사 결과 구릉 정상부에 부곽이 딸린 대형 목곽묘, 구릉의 사면 주변으로는 중소형 목곽묘와 수혈식 석곽묘가 확인되었다. 무덤은 2세기 전반부터 7세기 초까지 지속적으로 구릉의 동남쪽에서 서남쪽, 아래에서 위쪽으로 가면서 조성되었다. 주로 4~5세기대에 해당하는 대형 목곽묘와 수혈식 석곽묘가 중심이며 무덤과 유물의 변화 과정을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신라와 가야의 관계망 속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였던 부산 복천동 고분군 집단은 금동관, 갑주, 장식대도, 말머리가 달린 뿔잔 등 중요한 유물을 비롯하여 단일 유적으로 가장 많은 철제 갑주류와 무구류가 출토되었다.

2 부산 동래를 장악한 세력의 무덤

부산지역의 유적은 주로 수영강 수계를 중심으로 회동천과 온천천 주변의 동래 분지에 분포한다. 이미 수영강과 온천천 수계 최북단에 해당하는 노포동 유적에서 목관묘(木棺墓)와 대형급의 목곽묘(木槨墓) 및 생활유적 등이 확인되었고, 그중에서도 부산 복천동고분군을 형성한 집단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9년 복천동 고분군의 첫 긴급조사로 확인된 1호분은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로 무덤 중앙에 금동관과 금귀걸이 1쌍을 비롯하여 다량의 철기와 토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 조사로 인해 복천동 고분군을 조영한 집단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졌고 발굴조사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7호분에 말머리가 달린 뿔잔(馬頭式角杯) 1쌍과 환두대도, 금귀걸이, 목가리개(頸甲)이 나왔고 현재 학소대 고분으로 알려진 구릉의 동쪽사면에 위치한 목곽묘에서 700매에 달하는 비늘갑옷(札甲)이 확인되어 복천동 고분군 집단의 성격 규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2세기 후반에 등장한 목곽묘는 단독목곽묘로 바닥에 아무런 시설이 없는 간단한 구조였지만 점점 무덤구덩이가 깊어지고 바닥에 바닥돌을 까는 구조로 바뀌면서 부곽도 따로 마련되었다. 이때부터 갑옷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말갖춤류와 철정(鐵梃) 등 철제품도 다량으로 부장되면서 왜(일본)계의 원통토양 동기와 미늘쇠(有刺利器)도 등장한다. 토기도 단단한 재질의 단경호가 확인된다. 특히 57호 목곽묘에서 함안계 고배(원통형 대각, 원형·삼각형 투창)와 일본 하지키(土師器)계로 보이는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굽다리접시, 화로모양토기가 함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의 목곽묘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목곽의 기본 형태는 상자모양으로 추정하는데 나무는 거의 부식되어 남아있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조립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부 남은 나무편과 무덤 바닥에서 발견되는 부식흔적이나 회색 점토흔 등으로 조립 상태를 추정하기도 한다. 특히 무덤 바닥에서 확인되는 구멍은 목곽이 무덤 흙에 대한 압력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기둥을 세웠던 구멍자리였을 것이다. 54호 목곽묘처럼 기둥 구멍 안에 주춧돌이 들어 있는 경우는 목곽 위에 덮은 봉분 흙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부가적으로 설치한 시설물이라 할 수 있다.

구릉의 정상부를 차지하고 있는 수혈식석곽묘 중에서 93호분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무덤 벽석은 돌로 쌓아 올렸지만 나무뚜껑돌(木蓋)을 사용하였다. 또 주곽만 수혈식석곽으로 하고 부곽은 목곽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수혈식석곽묘라는 새로운 무덤 형태를 받아들이면서도 이전 시기의 목곽묘 전통을 일부분 고수하거나 중소형급은 수혈식석곽묘와 목곽묘를 모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위계 간의 뚜렷한 차이를 점점 보이면서 5세기 후반 이후에는 더 길쭉한 형태의 수혈식석곽묘가 등장하고 뚜껑돌의 매수가 기존의 4매에서 7~8매까지 늘어났다. 수혈식석곽묘의 부장품 양과 종류는 더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4세기대의 판갑(板甲) 대신 찰갑(札甲)이 많아지고 목을 보호하는 경갑(脛甲), 허리를 감싸는 요갑(腰甲)과 같은 갑옷의 다른 부속구와 마갑·마주도 등장하였다. 복천동고분의 10·11호분과 21·22호분은 구릉 고분 내에서 가장 정점을 찍는 무덤으로 금동관과 청동제칠두령(靑銅製七頭鈴) 등의 최상위급 위세품이 확인되었다. 6세기 이후에는 중소형급 무덤이 일부 조성되고 대형급 무덤은 연산동 고분이 있는 구릉 정상부에 배치되었다. 횡구식(橫口式)과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라는 새로운 무덤양식을 받아들이면서 부장 양상도 점점 간소화되었다. 횡구식석실묘(무덤 입구만 있는 무덤)의 경우는 구릉의 아랫부분에 있는 목곽묘를 파괴하면서 설치되기도 하였다. 횡혈식석실분(무덤 입구와 무덤길이 있는 무덤)인 65호에서는 중국 수(隋)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잔이 확인되어 무덤의 조영 시기를 대략 7세기 초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횡구식이나 횡혈식의 무덤은 피장자를 위에서 넣는 방식에서 무덤의 옆(단벽)을 입구로 설정하고 입구부를 마련해서 무덤 안을 들어갔다가 나오고 다시 추가장을 할 수 구조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주변 정세와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새로운 무덤 양식과 문화를 받아들여 성장한 부산 복천동 고분군 집단의 직접적인 생활 거주지에 대한 자료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근처 동래패총이나 낙민동패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며 무덤에 부장된 여러 부장품과 주변 패총에서 확인된 유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환경과 생활에 대한 정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3 철제갑주와 무기로 무장한 집단

단단한 금속인 철은 청동보다 뛰어난 효율성에 열광하였지만 철을 다루는 기술 습득과 생산은 간단하지 않았다.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확인된 수많은 철제품 중 갑옷·투구(甲冑)는 단일 유적으로서는 양과 질, 종류에 있어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릉에 조성된 약 200여 기에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량은 어마어마하다. 4~5세기대 복천동 고분군을 만들었던 집단은 철갑옷과 투구, 말갑옷, 철제무기류를 다량으로 소유할 수 있었던 매우 강력한 정치체였다.

현재까지 여러 고분에서 확인된 갑옷과 투구 자료를 정리해 보면 가야의 갑주가 신라보다 많다. 그 중에서도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만 판갑옷(板甲; 얇고 큰 철판 여러 점을 연결해서 만든 갑옷) 17점, 비늘갑옷(札甲; 작은 철판 수백 점을 연결해서 만든 갑옷) 7점, 투구 16점이 확인되었고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판갑옷 12점, 비늘갑옷 17점, 투구 27점이 확인될 정도로 압도적이다. 이렇게 압도적인 수량은 철을 다루고 제품을 만드는 기술력이 최고였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갑옷과 투구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따라 그것을 소유했던 집단의 성격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즉 갑옷과 투구가 몸을 지키는 방어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강력한 위세품으로서의 역할과 의례적인 역할까지 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철로 만든 갑옷은 실용성을 갖출 수 있지만 때로는 금동이나 은으로 만든 것도 있고 복천동 112호의 삼각판갑처럼 개폐 장치를 금동으로 만들어 위세와 권위의 상징성을 더하기도 한다. 갑주의 의례적인 역할에 대한 자료로 복천동 고분 86호에서 출토된 판갑옷의 측경판(어깨 윗부분에 다는 판)에 새 모양의 장식이 달려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 전투에서 실용성을 겸비하기 위해서는 거추장스러운 새 모양과 같은 장식은 오히려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신라와 가야에서 주로 확인되는 판갑옷은 3세기 말 혹은 4세기 초에 제작되기 시작해서 5세기에 비늘갑옷이 유행하면서 점점 자취를 감춘다. 즉 비늘갑옷을 이루는 작은 철판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 쪽으로 변하는데 이는 갑옷을 입었을 때의 착용감과 편리함을 우선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신라보다는 가야의 판갑옷이 장식 효과를 보다 많이 나타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라의 판갑옷은 목 가리개가 나팔형처럼 생겼고 가야 판갑의 목가리개는 반원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복천동 고분군의 판갑은 철판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세분되는데 가장 많은 것이 종장판갑(縱長板甲; 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이다.

단일 유적인 복천동 고분군에서 나온 갑옷과 투구의 양은 최대이며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위세품뿐만 아니라 의례적인 역할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중요한 물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갑옷을 수리한 흔적도 관찰된다. 갑옷에서 확인되는 수리 흔적은 신체의 변화나 갑옷 자체의 파손 등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갑옷은 철판을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하여 만들고 고사리나 새 모양의 장식을 추가하거나 갑옷 표면에 옻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최근 과학적인 분석으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주사전사현미경으로 관찰해보면 복천동 35호분 출토 말갑옷 편과 57호 종장판갑에서는 사슴과 동물털이, 복천동 86호 C, 164호 판갑에서는 담비나 여우 등 식육목 동물털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철로 만든 갑옷 위에 사슴과 여우와 같은 동물 털로 장식하거나 덮어 보온효과는 물론 장식적인 효과를 더해 과시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준다. 투구에도 윗부분에 깃털을 꽂는 부분이 있는데 새 깃털과 같은 것을 사용했을 것이다. 투구 형태도 종장판갑처럼 긴 철판을 이어 만든 종장판주(縱長板冑)가 일반적이다. 종장판주는 긴 철판을 모아주는 복발과 볼가리개, 뒷목가리개로 구성되며 처음에는 긴 철판이 대략 20매 정도였고 점차 40매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볼가리개도 한판으로 만들다가 점점 작은 철판인 소찰(小札)을 엮어 만드는 걸로 발전해나갔다.

갑옷과 투구뿐만 아니라 환두대도와 다량의 화살촉, 창 등의 다양한 무기로 중무장한 채 말머리에서 몸통까지 뒤덮은 말갑옷과 말투구를 착용한 말들의 웅장한 모습은 마치 중장기병과 같았을 것이다.

4 다양한 매장의례와 교류로 본 권위

복천동 고분군은 4세기대까지 목곽묘 전통을 유지하다가 5세기 전반에 수혈식 석곽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5세기 초에 해당하는 복천동 35·36호까지는 목곽묘 전통을 유지했고 5세기 전반 21·22호 단계부터는 수혈식 석곽묘를 채용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22호 석곽묘 안에는 목곽이 존재하고 바닥에 철정(鐵鋌)을 까는 목곽묘 전통의 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나의 무덤을 만들고 피장자를 죽음의 세계로 보내는 과정에는 다양한 의례적인 상황이 퍼포먼스처럼 펼쳐진다. 죽은 이의 권위와 힘을 살아남은 자들이 그대로 이어받고 그것을 과시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무덤 내부에 넣은 화려한 물건뿐만 아니라 목곽 위나 충전토, 뚜껑돌(蓋石) 위, 봉토 내부나 봉분 정상 부근에서도 다양한 의례적 행위가 이루어지는데, 남은 흔적을 통해 이러한 의례 행위를 유추할 수 있다.

특히 의도적인 행위의 결과물이 있다. 일반적으로 토기나 철기 자체를 그대로 두기도 하지만 일부러 토기를 깨뜨리거나 구부려서 넣기도 하는데 복천동 84호·60호·54호분 등에서 확인된다. 때로는 복천동 70호와 93호분의 사례처럼 원통모양 그릇받침(筒形器臺)를 깨뜨린 후 일부는 무덤 안에, 다른 나머지는 봉토에 넣어두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복천동 고분군의 계통을 이어가는 인근에 있는 연산동 M3호에서도 확인된다. 무덤 뚜껑돌을 덮어 밀봉한 후 먼저 굽다리접시와 갑옷과 철정 등을 일부러 깨뜨려 넣고 봉토를 쌓아올린 후에 말모양 토우나 연질토기를 봉토에 넣어두는 2차 의례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봉토 바깥쪽에 매납 유구인 수혈을 여러 군데 만들어 큰 항아리를 깨뜨려 매납하는 마지막 의례를 한 것이다. 이러한 무덤 축조에 대한 의례적인 관념이 무덤 안에서 봉분, 봉분 주변까지 확대되어 가는 것이 확인된다.

복천동 고분에서는 신라 토우처럼 토기의 표면에 작은 토우(흙인형)를 부착한 사례도 있다. 11호분의 통형기대에 거북이 모양의 토우 1점이 위를 향하여 부착되어 있으며, 32호분의 통형기대에는 멧돼지, 개, 말 모양의 토우가 서 있는 모습으로 붙어 있다. 토우 외에도 형상을 본떠 만든 상형토기인 말머리모양 각배(7호분)나 등잔 모양 토기(39호, 53호), 신발(짚신) 모양 토기(53호)가 있다. 그 외에도 긴 주둥이가 달린 작은 항아리나 주전자모양의 토기, 신선로모양 토기, 복숭아 모양의 잔 등이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교류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낙동강 유역을 둘러싼 신라와 가야 권역 간의 교류와 중국 중원과 북방지역, 왜(일본)와의 교류까지 포함한다. 이곳에서는 이미 4세기 후반에 아라가야의 함안을 비롯하여 5세기대에는 진주-고성의 소가야계 토기와 창녕계 토기가 확인되고 나아가 경주지역의 신라 양식 토기가 부장되기 시작한다. 대내 교류의 흐름은 무덤에 부장된 지역색이 강한 토기를 기준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면 대외 교류의 흔적은 말 재갈의 인수가 더해진 북방식 마구류, 뼈화살촉과 똑같은 철제화살촉, 10·11호분의 말투구는 중국 전연과 고구려 계통으로 볼 수 있고 21·22호분의 발걸이(鐙子)와 화살통은 중국 북연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또 80호분의 금박이 들어간 중층유리구슬(두겹의 유리사이에 금박이나 은박을 넣은 구슬 종류)도 서역이나 중국, 동남아시아 루트를 통해 들어온 것으로 본다. 왜(일본)와의 교류는 일본 고훈시대(古墳時代) 토기를 모방한 하지끼(土師器) 토기, 원통 모양 동기, 비취 곡옥, 마노로 만든 화살촉 모양의 장식품이 있다. 비취는 한반도에서는 산지가 없으며 일본 니아가타현(新潟県) 이토이가와(糸魚川)시 주변의 것과 유사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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