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농사직설

농사직설 [農事直說]

우리 땅에 알맞은 농법을 모아 편찬하다

1429년(세종 11)

농사직설 대표 이미지

농사직설

e뮤지엄(경상북도산림과학박물관)

1 개요

『농사직설』은 조선 세종대에 우리나라의 풍토에 알맞은 농법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세종은 정초(鄭招, ?∼1434년), 변효문(卞孝文, 1396년∼?) 등에게 명하여 기존 농법 중에서 우리 땅에 적절하고 중요한 방법만을 모아 책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내용은 곡식 종자의 선택과 저장, 논밭갈이, 벼·기장·조·수수·콩·팥·보리·밀 등 곡식의 재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농사직설』은 조선 전기의 농업경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2 농본 정책과 농서 편찬

전근대 사회에서 농업은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민생을 넉넉하게 할 뿐 아니라 국가 재정의 확보에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국가에서는 다양한 노력을 하였다. 사직(社稷)에서 토지와 곡식의 신에 제례를 시행했고, 한재와 수재가 없기를 기원하며 곳곳에서 기우제(祈雨祭), 기청제(祈晴祭) 등을 지냈다. 절기를 파악하고 기후 변화를 예견하기 위해 자격루, 측우기 등의 과학기구를 고안하였고, 수리 시설의 증대에도 노력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에서는 농경, 양잠과 관련된 각종 권농(勸農)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와 관련해서 농서(農書)도 꾸준히 편찬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농서의 존재와 활용에 관한 문헌적 접근은 고려시대부터 가능하다. 우선 고려시대에는 『제민요술(齊民要術)』, 『사시찬요(四時纂要)』 등 중국의 농서를 수입하여 활용하였다. 『원조정본농상집요(元朝正本農桑輯要)』처럼 우리나라에서 재간행해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대에는 『농상집요』에서 밭을 갈고 작물을 재배하는 등의 내용을 뽑아 이두로 번역해서 『농서집요(農書輯要)』를 편찬했고, 양잠 관련 내용을 발췌하여 이어(俚語)로 번역한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를 간행했다.

세종도 농업 서적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1428년(세종 10)에는 ‘농서(農書)’ 1천 부를 인쇄하도록 하였는데, 연구자들은 대개 이 농서를 『농상집요』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429년(세종 11)에는 『농사직설』을 편찬하였다.

3 『농사직설』을 편찬하기 위해 방문 조사를 실시하다

조선 태종이 중국에서 번역된 농서를 우리 말로 번역하여 농법을 전파했다면, 세종은 조선이 중국과 기후와 풍토가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고 조선 땅에 알맞은 농법을 마련하려 했다. 그 일환으로 『농사직설』도 편찬되었다.

기존 농서에 대한 세종의 문제 인식은 『농사직설』의 편찬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우리 풍토와 기후에 알맞은 농법을 찾기 위한 방법은 경험 많은 농사꾼들에 대한 ‘방문 조사’였다. 특히, 농사가 잘 되는 지역인 충청·전라·경상도의 ‘노농(老農)’, 즉 나이 많은 농사꾼의 경험과 지식을 중요하게 고려하였다. 1428년(세종 10) 윤4월에 세종은 경상도 감사에게 명하여 경상도의 농사 비법을 노농에게 물어 책을 만들어 올리라고 하였고, 같은 해 7월에는 충청도, 전라도 감사에게 명하여 해당 도의 노농에게 농법을 물어 책을 만들어 올리도록 하였다. 그 결과 오곡이 토양의 성질에 적합한지의 여부에서부터 밭 갈고 씨 뿌리고 김 매고 수확하는 방법 등이 조사되었다.

정초와 변효문은 위와 같은 보고서 형태의 책들을 검토하여 재정리하였다. 중복된 것을 빼고 중요한 것을 간결하게 정리하여 『농사직설』을 편찬하였다. 정초와 정효문은 『농사직설』 외에도 세종대의 학문적 성과에 기여한 바가 크다. 정초는 『칠청산내편(七政算內篇)』의 편찬과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관여했고, 변효문은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농사직설』의 편찬 이후 세종은 책의 보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먹는 것[食]은 백성에게 으뜸이 되고, 농사[農]는 정치의 근본이 되므로” 권농은 국왕과 관료의 필수 과업이었다. 특히 지방 수령들의 임무가 막중했다. 수령이 지방을 통치하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덕목, 즉 ‘수령칠사(守令七事)’ 중에서도 농사와 양잠을 번성하게 하는 일[농상성(農桑盛)]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세종은 1430년(세종 12)에 『농사직설』을 인쇄하여 전국의 각 고을과 중앙의 2품 이상 관리들에게 반포하였다. 수령들에게는 책 내용을 농민들에게 잘 알려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세종의 입장에서 『농사직설』의 보급 상황이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1437년(세종 19)에는 책을 추가로 간행해서 각 도에 나눠 보냈다. 이후에도 수령들에게 『농사직설』을 참고하여 권농할 것을 여러 차례 명하였다.

세종은 농업 기술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직접 경복궁 북쪽의 언덕에서 농사를 지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농사직설』을 비롯한 각종 농서를 연구하였다. 『농상집요』, 『사시찬요』, 『농사직설』 등의 여러 농서를 비교하여 벌레 피해에 대한 방안을 찾아보거나 파종 시기를 분석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농사직설』 편찬은 정초, 변호문의 저작이기는 하지만, 오롯이 그들의 노력으로만 행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질적으로 농사를 공부해 보려고 했던 국왕 세종부터 중앙의 관료,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 노농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이뤄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4 백성들에게 필요한 농법을 담다

『농사직설』은 10조항 19면으로 되어 있는 매우 얇은 책이다. 『농상집요』를 저본으로 하고 있지만, 구성 방식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농사직설』은 『농상집요』에 비해 구체적인 기술이 많고, 우리나라의 고유한 농법을 기술하려는 취지가 반영되어 있다.

10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곡식의 씨앗 준비[備穀種], 땅 가는 방법[耕地], 삼의 재배[種麻], 벼의 재배[種稻], 기장과 조의 재배[種黍粟], 피의 재배[種稷], 대두와 소두의 재배[種大豆小豆], 보리의 재배[種麥], 참깨의 재배[種胡麻], 메밀의 재배[種蕎麥]의 순서이다.

앞의 두 조항은 씨앗 마련과 논밭갈이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씨앗을 마련하는 부분에서는 씨앗을 젖게 하지 말 것, 각 품종의 씨앗을 미리 한 되씩 묻어서 시험해 볼 것, 겨울에는 얼지 않게 할 것, 마소의 오줌을 담아 거름으로 활용할 것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논밭갈이 부분에서는 계절에 따라 밭가는 깊이를 달리 할 것, 거친 땅을 갈 때는 애벌갈이를 깊게 할 것, 살짝 맛을 봐서 토질을 파악해 볼 것 등과 같은 농법이 서술되었다.

뒤의 여덟 조항은 삼, 벼, 기장, 조, 피, 대두, 소두, 보리, 참깨, 메밀 등 각 품종별 재배 방식을 기술하였다. 이 중 가장 분량을 많이 할애하는 부분은 벼 조항이다. 벼 재배를 다룬 종도(種稻) 부분에서는 직파법(直播法), 건답법(乾畓法), 묘종법(苗種法), 산도법(山稻法) 등이 소개되어 있어서 날씨, 지형, 수리(水利) 등의 조건에 따라 재배 방식을 달리할 수 있었다.

이외에 경작도구나 거름의 종류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일례로 묵은 땅을 개간할 때에는 인분을 활용하도록 했다. 종도 부분의 관련 기술을 보면, “초목이 빽빽하게 무성한 곳에 새로 개간하여 논으로 만들려면 불을 놓아 태운 후에 3, 4년 후에 지력을 살펴서 인분을 쓴다.”고 쓰여 있다.

5 『농사직설』 이후의 농서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농사직설』은 농업경제에 기반한 조선왕조가 농업생산력을 늘리고자 했던 권농 정책의 일환으로 편찬한 책이다. 이후 『농사직설』은 1492년(성종 23), 1656년(효종 7), 1686년(숙종 12) 등 여러 차례 간행되었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항목과 내용이 첨가되었다.

현재 『농사직설』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소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등 여러 곳에 남아있지만, 세종대 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가장 오래된 판본은 규장각 소장본으로, 1581년(선조 14)에 춘천부사에게 하사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판본은 서명이 『농사직설』이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농사직설』과 『금양잡록(衿陽雜錄)』이 같이 묶여 있다. 『금양잡록』은 농서를 만들면서 노농들의 경험을 담았다는 점에서 『농사직설』과 비슷하다. 『금양잡록』은 15세기 말에 강희맹(姜希孟)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의 체험을 반영하였고, 더불어 그곳에서 만난 노농들과의 대화하며 얻은 농업 지식을 담았다.

『농사직설』을 내용을 반영하여 새로 편찬한 농서도 여럿이다. 1655년(효종 5)에 신속(申洬)이 저술한 『농가집성(農家集成)』은 『농사직설』, 『금양잡록』,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 『구황촬요(救荒撮要)』가 합본되어 있는데, 개수와 보충이 행해져 있다. 17세기의 대표 농서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8, 19세기로 갈수록 점차 농업기술이 발달하였고, 농서의 내용도 대폭 새로워져 갔다. 그럼에도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은 여전히 『농사직설』을 기초로 활용하였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