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1.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
  • (2)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

(2)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

 국내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은 3월 중순 이래 중국 북경과 만주, 특히 노령에서 상해에 온 이동녕·이시영·조완구·조성환·김동삼·조영진·조소앙 등 30여 명에 달하는 원로급 인사들이 상해에 도착하면서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광수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 ‘독립운동의 대선배’들은 “왜 33인만 거드는가. 나라의 법통이 하필 33인에 있는가. 만일 33인이 아무 의사도 남겨놓은 것이 없으면 영영 정부조직을 못하는가”라고 반박하면서 무한정 기다릴바에야 상해를 떠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221)이광수, 앞의 글, 256쪽.

 임시정부의 조직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은 상해에 집결한 인사들의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의회에 대한 견제와도 관계가 있다. 1월에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한 신한청년당은 연락·자금조달과 운동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여운형을 만주와 노령에 파견했다. 여운형은 노령쪽 인사들을 만나 파리대표 파견문제와 동지 규합, 자금조달, 독립운동의 중앙기관 문제 등 전반에 대해 논의했다.222)이만규,≪여운형선생투쟁사≫(총문각, 1946), 25쪽.

 여운형·이동녕·조완구는 중앙기관은 무력단체가 아니고 외교활동을 해야 하므로 국제도시인 상해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문창범·남공선·김립 등은 수십만 동포가 살고 있는 노령이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의견의 불일치가 해소되지 않은 채 노령의 민족운동 단체 대표들은 1919년 2월 25일 대한국민의회 조직을 결의하고 3월 17일에는 독립선언과 함께 그 조직을 선포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동녕·조완구·조성환·조영진 등은 북간도를 거쳐 만주의 이시영·김동삼·조소앙 등과 합류하여 상해로 가버렸다. 상해임시정부는 이들의 주도로 성립되는 것이다.223)반병률,<한인사회당의 조직과 활동(1918∼1920)>(≪한국학연구≫5,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1993), 152∼153쪽.

 노령과 만주지역 인사들이 상해로 집결함에 따라 독립임시사무소는 중앙기관 수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동녕·이시영·조소앙·이광·조성환·신석우·이광수·현순의 8인으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8인 가운데 5인이 기호파 인사들인 이들이 상해 임시정부를 출범시킨 핵심이었다. 최고기관을 수립하기 위한 움직임은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4월 초 독립임시사무소는 내외 각지에서 상해로 모여든 민족운동자들을 중심으로 “많은 회의와 토론 후에 임시의정원을 세우기로 결정”했다.224)Soon Hyun, op.cit., p.82.

 4월 8일에는 강대현이 경성독립단본부로부터 이동휘를 집정관으로 하는 임시정부의<각원명단>과<헌법초안>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상해의 민족운동자들 간에는 ‘紛議’가 일어났으며225)<獨立運動에 關 略史>(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資料4, 臨政編Ⅳ), 207쪽. 같은 날 정부 형태와 임시의회의 기본골격을 담은 임시관제가 공포되었다.226)外務省警察史 支那之部,≪朝鮮民族運動史≫1(未定稿), 87쪽.

 1919년 4월 10일 오전 10시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손정도와 이광수의 제의로 ‘각 지방 대표회’가 소집되었다. 회합에 모인 인사는 총 29명이었다. 모임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으로 하자는 조소앙의 동의가 신석우의 제청으로 가결되었고 무기명 투표로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각 지방의 ‘대표’라고 했지만 이는 명분에 불과했다. 이들 29인 가운데 서울·경기·충청 등 기호지역 출신이 절반에 달했다. 앞서 독립임시사무소에서 최고기관 수립을 위해 구성되었던 ‘8인 위원회’ 전원도 이에 포함되었다. 때문에 뒤에 상해로 들어온 인사들 사이에서 이들 ‘초대’ 의원들의 지역 대표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227)李賢周,<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성립과 위상 변화(1919∼1922)>(≪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80주년기념논문집≫상), 217∼218쪽.

 이튿날에 이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먼저 ‘대한민국’의 국호와 연호를 제정했다. 신석우의 동의와 이영근의 재청으로 가결된 이 국호가 갖는 의미는 민주정체의 국가를 표현하는 ‘민국’의 채택이었다. 나라 이름은 10년 전에 잃은 대한제국을 회복한다는 뜻에서 ‘대한’을 찾아 쓰되 정치체제는 군주제를 지양하고 민주주의에 입각한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228)윤병석,≪한국사와 역사의식≫(인하대출판부, 1989), 241쪽.

 이어 임시관제를 집정관제에서 총리제로 개정하고 국무원을 선출했다. 즉 강대현이 가져온<헌법원문>과 집정관제<각원명단>을 토대로 4월 8일에 선포했던 임시관제를 개정, 집정관을 폐지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국무원을 내지본부와 합의 선거”한 것이다.229)<獨立運動에 關 略史>(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資料 4, 臨政編Ⅳ), 208쪽. 임시관제 개정의 핵심은 집정관제를 폐지하고 국무총리 직제로 바꾼 것이었다. 다음으로<10개조의 임시헌장>을 제정했다.

 주목되는 것은 국무총리로의 관제개정에도 불구하고, 정부 각원의 인선은 강대현이 소지해 온 원안이 거의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상해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230)<임시의정원기사록>제1회집(김정명 편,≪朝鮮獨立運動≫Ⅱ), 32∼35쪽. 반병률은 경성독립단본부에서 집정관으로 선임되어 있던 이동휘가 국무총리 후보로언급조차 되지 않은 사실을 들어 집정관제를 국무총리제로 바꾼 관제개정의 목적이 행정수반을 이동휘에서 이승만으로 교체하려는 것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潘炳律,<大韓國民議會와 上海臨時政府의 統合政府 수립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2, 지식산업사, 1988, 97쪽).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교통총장 문창범,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내무차장 신익희, 외무차장 현순, 재무차장 이춘숙, 교통차장 선우혁, 군무차장 조성환, 법무차장 남형우, 국무원비서장 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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