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에서 1930년 사이 광주학생운동(‘11·3학생운동’)831) 역사용어에 대해서는 일반적이고 객관성을 지니는 것이 타당하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가들이 지역 이름을 붙여 사용했으나 본 연구자는 당시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항일민족운동으로 규정하여 11·3학생운동으로 명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의 요람지는 전라남도 광주였다.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몇 가지 방향을 설정하여 살펴보면, 첫째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은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혁명을 일으켰던 지역이란 점이다. 즉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이 지역에서 일어나 조선왕조와 외세에 대하여 치열한 저항운동을 벌였으며 일제침략이 노골화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일제에 대항하여 의병전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지방민들의 불의에 대한 저항의식이 어느 지역보다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1919년 3·1운동시 전국적인 만세시위운동이 활발하였으나 지역적으로 늦었던 곳이 전라도였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학생들은 학생운동에 의한 민족운동은 이 지역에서 일으켜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우리 나라의 곡창지대인 이 지역에 대한 일제의 착취가 가혹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동이 학생운동을 유발시켰다 하겠다.
어떻든 간에 광주는 호남의 중심지로 정치·경제·사회·문화 제분야에서 호남을 이끌어가던 곳이었다. 더욱이 교육에 있어서 호남을 대표하던 2개의 중등교육기관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인 학생의 광주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인 학생의 광주중학교였다. 이들 두 학교는 3·1운동 후 설립된 호남의 교육기관 중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리하여 항상 서로 경쟁·대립하였고 학생운동시에는 서로 적이 되었다. 두 학교는 민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도 서로 대립, 충돌하였다.
한·일간의 두 지방학교의 대립과 함께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방편으로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 조직되었던 비밀결사인 독서회의 조직과 동맹휴학의 파동이 광주에도 밀려와 광주학생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광주에 있어서 이러한 현상은 1926년 6·10학생운동 이후인 그해 11월 3일 醒進會가 조직되면서부터였다. 성진회는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의 張載性·鄭瑀采·王在一 등 16명이 崔圭昌의 하숙에서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이 회의 임원과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832) 朝鮮總督府 警務局,≪光州抗日學生事件資料≫(風媒社, 1979), 361쪽.
이때 참석한 16명은 장재성·林同弘·정우채·金匡溶·安鍾翊·金昌柱·최규창·蔡泳錫·왕재일·鄭南均·朴仁生·金漢苾·鄭鍾奭·鞠淳業·文升洙·鄭東秀 등이다.
임원:총무 왕재일, 서기 박인생, 회계 장재성.
강령:① 일제의 기반에서 한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②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절대 반대한다.
③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요구한다.
(朝鮮總督府 警務局,≪光州抗日學生事件資料≫, 風媒社, 1979, 361쪽).
한편 회원의 의무로서 ① 사회과학연구의 정진, ② 비밀엄수, ③ 언문신문의 숙독, ④ 동지의 획득을 결정하고 매월 제 1·3 토요일을 연구일로 정하고 활동하였다.
성진회는 조직 5개월만인 1927년 3월 자진해산하고 각기 학교단위의 비밀조직을 통한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1929년 6월 중순 경 독서회중앙부를 결성하였다.
독서회중앙부는 광주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이며 성진회의 간부였던 장재성이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생인 金相煥·金普燮·尹敬夏, 광주사범학교 재학생 宋東植·姜達模, 광주농업학교 재학생 曹吉龍·金順福 등과 회합하여 성진회를 발전·확대시킬 것을 결의하고 조직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장재성은 金基權과 상의하여 학생소비조합을 만들어 자금조달에 힘쓰면서 각 학교별 독서회 조직에 힘써 광주고등보통학교독서회·광주농업학교독서회·광주사범학교독서회·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독서회 등이 조직되도록 힘썼다.
광주에서의 동맹휴교는 1920년 사립학교로 출발한 광주고등보통학교가 1923년 공립으로 바뀐 다음 해부터 일어났다. 즉 1924년 봄 광주고등보통학교 4학년생 金昌植이 일본인 양화점 주인 篠原과의 언쟁이 도화선이 되었고, 이어서 그 해 6월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간 야구시합의 불상사가 발단이 되어 광주고보생의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이 동맹휴교로 구속된 학생들은 그 해 9월에 모두 석방되었으나, 동맹휴교의 주동자로 지목된 광주고등보통학교 4년생인 高光得·鞨採德·崔憲柱·池昌洙 등은 퇴학처분을 받아 첫 희생자가 되었다.833) 梁東柱,≪抗日學生史≫(靑塔出版社, 1956), 25∼26쪽.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동맹휴교가 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1926년 성진회가 조직된 이후부터이다. 1927년 5월 하순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2·3학년생들이 ‘한일학생 교육제도의 차이와 시설의 차이’를 지적하고 물리·화학교실의 확충을 비롯한 몇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당시 교장 시라이(白井)는 시설확충을 해주겠다는 공약을 하여 일단 무마되었으나 해를 넘겨도 공약은 실천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 1928년 6월 26일부터 본격적으로 항일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이 동맹휴교의 직접적인 동기는 광주고등보통학교 5년생인 李景采가 광주 송정리 불온문서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면서부터이다. 광주 송정리사건이란 1928년 4월 16일 광주와 송정리 일대에<朝鮮獨立宣言文>이 살포된 것을 중대시한 광주경찰서가 광주와 송정리의 청년과 학생들을 구속하였는데 그 중에 이경채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경채는 6월 8일 구속되니 이 사실을 통고받은 광주고등보통학교장 시라이는 그를 19일자로 퇴학 처분했다. 이 사실을 수일 후에 안 학생들은 이경채의 제적이유를 밝혀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수업거부로 대항하자 24일 시라이 교장은 사태수습을 위하여 학부형회를 소집하고 대책을 협의하기에 이르렀다. 학교 당국과 학부형회에서도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자 학생대표들은 25일 동맹휴교를 결의, 26일 2·3·4·5학년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다음과 같은<진정서>를 학교당국에 제출하고 일제히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진정서>
① 교우회의 자치권 인정.
② 물리·화학교실의 신축.
③ 이경채의 제적사유 해명과 무죄시의 복교.
④ 하세가와(長谷川)외 6명의 무자격 일본인 교사의 축출.
⑤ 조선인 敎諭의 채용.
⑥ 조선어문법의 교수.
⑦ 상기 요구조건을 실현시킬 수 없는 경우에는 시라이교장은 인책 사퇴할 것.
(光州學生獨立運動同志會 編,≪光州學生獨立運動史≫, 國際文化社, 1974, 48∼49쪽;梁東柱,≪抗日學生史≫, 靑塔出版社, 1956, 35∼36쪽).
이같은<진정서>를 제출하고 맹휴에 돌입하자 학교 당국은 긴급직원회를 열고 다음 날인 27일 주모자로 鄭東華 등 27명을 퇴학, 朴世模·金基權 등 281명을 무기정학 시켰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7월 10일 경 최규창의 하숙인 진남여관에 모여 맹휴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중앙본부 설치를 결의하고 다음과 같은 격문을 학부형들에게 발송하였다.
학부형 여러분! 우리들의 맹휴는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정책 밑에 유린, 기만당하고 있는 400명 학도의 최후의 비명인 것입니다. 학교 당국의 처사는 우리의 참다운 정신을 박탈하고 우리로 하여금 얼빠진 한낱 고깃덩어리로 만들려는 가공할 정책인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과 명예를 걸고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할 것을 맹서하는 바입니다. 학교의 배후에는 도 당국과 경찰 등 절대적인 권력이 도사리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학부형 여러분이 있을 뿐이니 학부형 여러분은 그들의 어떠한 꾀임이 있더라도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전의 내 자식 하나보다 이 민족과 강산이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학부형 제위께서는 끝까지 우리편에 서서 신조선 건설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려는 미약한 우리들을 지도, 후원하여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일체 협력하여 문제해결에 힘써 주실 것을 갈망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맹휴지도학생들은 광주고등보통학교 전교생들에게 끝까지 결사적으로 투쟁하자는 격문을 발송하고 다시 8월 초순 중앙본부의 격문을 발표하여 일제의 주구 노예됨의 거부와 자유쟁취를 호소하였다. 한편 시일이 오래되고 일제경찰의 압력이 가중됨에 따라 동요되는 학생들의 기색을 살피고 이들에게 경고문을 보내어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도 했으니 경고문의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君의 신호로 궐기했던 400명의 의사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 억압과 박해 때문에 유린된 전조선의 학생, 대중을 보라! 우리의 투쟁을 물었을 때 군은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전 조선학생 대중의 피가 되고 눈물이 되는 것을 군을 잊지 않았겠지! 용감하게 일어서서 돌진하라.
그러면서 맹휴단 중앙집행본부는 8월 하순 ① 맹휴해결 전 타교 전학 금지, ② 중앙본부 명령에 절대 복종, ③ 반동분자 박살 등 5개 항목의 실행요목이 담긴 격문을 학우들에게 보내고 아울러 학부형 대표들에게도 학교측과 타협하는 행위에 대하여 엄중 항의를 하였다.
1928년의 광주고등보통학교 동맹휴교는 그해 10월 초 일단 중지될 때까지 반년이나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의 희생도 커서 수형자가 16명, 퇴학생이 40명, 무기정학생이 300명이나 되어 얼마나 동맹휴학이 격렬하였던가를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광주에 있어서 광주고등보통학교와 함께 동맹휴교가 극심하였던 학교는 광주농업학교였다. 광주농업학교는 산업중등교육기관으로 인문계 중등교육기관인 광주고등보통학교와는 전라도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었던 학교였다.
이 학교에서는 1928년 6월 27일 보통작물을 담당하던 일본인 교유 모리오카(盛岡)를 배척하는 진정서를 4년생 宋聖秀·金允性, 3년생 柳上烈, 2년생 羅碩鉉 등이 주동이 되어 2·3·4년생 150명의 연명을 얻어 히라노(平野)교장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교장은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학생들을 질책하자 29일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학교 당국이 송성수 등 주동자 12명을 퇴학시키고 동조자 10명을 무기정학에 처하자, 이에 격분한 맹휴학생들은 폐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학교와 대항하기 위하여 조직을 강화, 동원부·연결부·모계부·탐정부를 두어 맹휴의 체계적·조직적인 움직임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사실 광주농업학교의 동맹휴교에서 작물교사의 배척은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하였고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교와 유기적 연관하에 일어났던 반일민족운동이었으니 그것은 이 당시 맹휴학생들이 발표했던 다음과 같은 격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격문>
①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② 한일공학제실시는 절대 반대한다.
③ 싸워라! 싸워라! 모국을 위해서 최후까지 싸워라.
④ 모국의 생명은 우리들의 활동에 달려있다. 2천만 동포를 부활시키고 삼천리강산을 빛내는 것은 우리들의 쌍견에 달려 있다. 시기를 놓치지 말아라. 우리들의 친우들이여! 금번의 사건은 혁신의 기초, 갱생의 기초다. 각오하자.
(光州學生獨立運動同志會 編,≪光州學生獨立運動史≫, 國際文化社, 1974, 53쪽).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