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동학을 사교로 규정하여 교조인 최제우를 처형하였으나, 제2대 교주 최시형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하여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동학의 포교에 힘썼다. 당시 농촌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외세의 침투에 대한 반발 등으로 인하여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학은 농촌 사회에 널리 보급될 수 있었으며, 교단 조직도 갖추게 되었다.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아 온 동학교도들은 농민들의 현실에 대한불만이 높아지는 분위기를 이용하여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동학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과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였다.
삼례 집회 후 동학의 지도급 인사 40여 명이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하였으며, 곧이어 충청도 보은에서는 동학 교도와 농민 2만여 명이 모여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 보은 집회에서는 동학 신앙의 자유뿐만 아니라 외세의 배척과 부패한 관리의 처벌도 주장하였다.
⋅ 새야 새야 파랑새야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