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5. 근현대
  • 2)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독립운동
  • (1) 일제의 강점과 식민통치의 기조
  • 가.본국인 생활경제와 직결시킨 식민지 경제수탈

가.본국인 생활경제와 직결시킨 식민지 경제수탈

 식민지 건설의 일차적 목표는 경제적 이익추구에 있었는데 경제 이익은 영국이 인도에서 추구했던 상품시장을 통해서,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주로 원료시장을 통해서 이익을 획득한 경우도 있었고, 포르투갈이 고아나 마카오에서, 영국이 싱가포르나 홍콩을 통해서 추구했던 경우와 같이 무역수지를 통해서 이익을 올리는 방법도 있었다. 그와 같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경제수탈은 다방면으로 추구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도 다를 바가 없었는데 다만,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 국민의 생활경제와 직결된 식민지 경제를 이루어갔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이 집중적으로 표현된 것이 1920년대의 산미증식계획이나 1930년대의 농촌진흥계획, 1940년대의 증미계획의 추진이었다. 그들의 식량문제를 식민지 수탈을 통해서 해결한 것이다. 그래서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식민지 지주를 통한 수탈체제를 구조화시켰다. 수탈을 극복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일하고(죽음을 담보한 노동) 인구 증가에 따라 노동력이 상승하여 미곡 수확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대일 반출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농민의 생활은 빈곤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1930년 총독부 통계에 절량농가가 6할에 이를 정도였다.459)朝鮮總督府,≪朝鮮의 小作慣行≫下(1932), 74∼75쪽에 의하면 1920년의 소작농민(자소작 포함)이 77.2%였고, 1930년에는 78.8%로 8할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때 미곡의 수확량을 보면 1917년 1천3백만석인데 1927년에 1천5백만석으로 증가했으나 대일 반출량이 1917년에 1백50만석, 1927년 5백60만석으로 폭증하여 조선에 남는 쌀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1944년에는 수확량의 6할을 공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경제 수탈이 생산지 조선의 조건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소비지 일본의 요구에 따라 조선경제가 좌우됐다. 식민지 수탈이라고 해도 일단, 시장 논리에 따라 식민지 경제를 성장시킨 다음에 수탈을 극대화하는 구미 제국주의 방식과 달랐다. 그러므로 일본의 수탈 양상이 잔인하였다.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있다는 조건이 그것을 부채질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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