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민족에 대한 동화를 획책한 경우는 일본 제국주의뿐이었다. 미주 대륙이나 아프리카 원주민이 동화를 원한다고 해도 유럽 식민국가들이 반대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조선민족을 동화하려고 노력하였다. 동화란 조선인을 일본에 흡수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런데 동화를 추진하다가 만주족이 중국(漢)민족에게 동화되듯이 문화권이 같은 탓으로 역동화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식민지 동화정책은 주밀하게 추진되었다. 학문과 예술과 종교를 일본의 학문·예술·종교에 예속시켰다. 특히 민족형성과 발전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는 언어·문학·역사를 파괴하여 일본식으로 재편해 갔다.460)민족동화정책을 1943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遠藤柳作은 1959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벚나무와 소나무, 버드나무가 재료로 한데 섞여 하나의 벚나무 통으로 태어나고, 소나무도 버드나무도 벚나무로 변화해 주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여기에 강력한 테도 두루고, 테를 선으로 조여 나갔다고 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감정상의 마찰도 생기고 생활상의 마찰도 일어났던 것입니다”(宮田節子(정재정역),≪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 혜안, 2002, 277쪽).
민족이란 정치·경제는 망해도 문화의 기능을 통해 존속하기 때문에 식민지 속에서도 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시기의 민족문화는 민족 보존의 영양소 구실을 했다. 따라서 학문과 예술과 종교 등의 문화가 민족의 특수성을 상실하면 민족을 지탱할 힘을 잃게 되므로 다른 민족에 흡수되고 만다. 그것을 일본 제국주의가 겨냥하고 조선의 문화를 파괴해갔다. 문화파괴는 먼저 식민교육을 통하여 강행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6세)에 일본어를 주당 6시간을 배정하여 가르쳤는데 그것은 조선의 어문을 파괴하기 위함이었다. 토착어문이 있는데도 6세 어린이에게 토착어가 아닌 외국어를 주당 6시간을 강제교육한 경우도 일본 식민교육의 특징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어린이에게 일본 노래와 일본 역사를 가르쳤고, 일본 위인전을 교양도서로 보급하였다. 그때 한편에서는 조선의 노래를 봉쇄하고 말과 글도 막고, 조선의 위인이나 역사는 잘못되거나 괴상하게 꾸몄다. 이러한 식민문화와 식민사학이 조선인의 교양과 상식을 지배한 가운데 조선민족은 일본 민족으로 개조되어 갔다. 바로 그것을 동화정책이 노리고 있었다.
결국 조선민족은 소멸하고 일본민족만 남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1869년 북해도의 설치 통합, 1879년의 유구 통합으로 아이누족이나 유구인이 일본민족으로 전환되어 갔듯이 조선민족도 같은 궤도를 밟을 것으로 전망한 것이다. 이러한 식민통치상의 특수성은 구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었다.461)민족동화정책이 구미제국주의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인데 그것을 일본은 “외국의 식민통치에서 보이듯이 원주민은 가급적 미개한 상태로 내버려두라든가, 원주민에 관해서는 자연적인 흐름에 맡겨두라는 식의 사고방식, 통치자는 지배자로서 원주민과 섞이지 않는다든가 하는 사고와는 기본적으로 달랐고”라고 기만적으로 변론했다(宮田節子, 위의 책, 278쪽). 그것이 일본으로서 불가피했던 것은, 원주민을 방치했던 구미식으로 통치하면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민족동화의 강력한 통제가 요구되었다고 하겠다. 민족동화정책은 1910년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총독이 부임하면서 一視同仁이란 구호로 식민문화를 통하여 추진되었는데, 1931년 일본이 만주까지 정복한 다음에는 조선을 완전하게 통제할 것을 획책하여 식민문화에 그치지 않고 식민통치 전반에 걸쳐 민족동화(민족말살)를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조선에서는 內鮮一體(1936년 南次郞 총독 제창), 만주에서는 五族協和를 들고 나왔다.462)金泰國,≪滿洲地域 朝鮮人 民會 硏究≫(국민대 박사학위논문, 2002), 240쪽. 만주에서 오족협화를 추진하자면 조선에서 강력한 안전장치로 내선일체가 필요하다고 계산한 것이다. 내선일체를 표방하면서 가정에 소형 가미다나(神柵)를 설치케 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게 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이른바 국민복을 입게 했다. 다음에 입법을 추진한 것이 징병제·의무교육제·참정권문제였고 3자는 정치 이론상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징병제 외에는 실시할 겨를이 없었다. 아울러 식민지 경제수탈을 극대화한 것도 민족의 저항력(물적 기반)을 박탈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해방 후에 식민지에 협조한 사람에 대한 숙청 논의가 정치적 배신자와 달리, 최남선·이광수·최린 등, 학자·예술가·문학가·종교인·교육자·언론인에게 더 강력하게 요구되었던 이유도 일본이 문화의 기능을 통하여 민족동화정책을 추진했던 식민통치상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식민지시기의 학자나 문화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 문필을 더럽히고 강연을 하고 다녔다. 그들은 사회적 인물의 이름을 행사할 때는 꼭 사회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몰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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