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5. 근현대
  • 2)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독립운동
  • (1) 일제의 강점과 식민통치의 기조
  • 다. 민족동화와 식민수탈의 극대화를 위한 직접식민통치

다. 민족동화와 식민수탈의 극대화를 위한 직접식민통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7년 10월 31일 한국중앙농회에서 일본인 2백만 명의 농업이민을 발표한 바가 있었다.463)近藤書店,≪朝鮮의 回顧≫(1945), 193쪽. 그때 한국 인구가 1천3백만 명이었으므로 6.5명당 1명의 일본인이 사는 식민사회가 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군인과 관리와 그 가족까지 포함하면 6명당 1명을 계산하였을 수도 있다. 식민지에 대한 이러한 높은 비율의 이민을 계획한 제국주의가 구미 열국에는 없었다. 구미 열국은 필요에 따라 군인은 부대 인원을 주둔시켰지만 간접 식민통치를 했기 때문에 관리의 수는 적었다. 인도에 파견된 영국 관리의 수가 5천 명을 넘지 않았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영국보다 직접통치성이 강하다고 말하는 프랑스의 월남 통치에서도 괴뢰일망정 토착인의 임금을 통하여 통치하는 간접 방식이었다.464)괴뢰국왕에 의한 간접통치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심할 수 있다. 괴뢰국왕이 독립운동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토착인의 생활풍속을 유지하고 민족적 정서를 확산시키면 그 정서가 민족의 대중적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월남의 경우가 대표적 사례로서 그것이 1945년 해방 후에 민족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이 되었다. 그렇다고 괴뢰국왕이 민족운동상의 위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괴뢰 국왕이 해방 후에 근신했다면 월남 국민도 그를 대우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조선통치는 시골의 지서 순사와 학교 교사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산골 읍면에서 일본인은 식민지 신귀족으로 자리잡아갔다. 공장과 농장을 설치한 경우에도 노동 임금은 일본인이 두 배를 넘게 받았다. 비교적 완화됐다고 한 1940년대에 서울의 면방적 여공의 경우 조선인:일본인의 월임금이 0.70:1.69원이었으니 2배를 넘었고, 남자 면가공직은 0.85:3.10원으로 3배를 넘었다.465)≪昭和十九年 朝鮮年鑑≫(京城日報社, 1943), 202쪽. 이것은 조선 노동자의 인력을 수탈한 한편, 일본 노동자의 대량 유인과 일본인의 이민을 통한 식민지에 대한 직접 지배라는 일석이조의 소득을 계산한 것이었다.

 그래도 1백만 명의 일본인 이민을 넘기지 못하였다. 그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1907년의 예상과 달리 1931년부터 만주를 침공하여 일본인의 해외진출이 다변화되었기 때문이다. 1백만 명을 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직접통치를 강행하기에 넘치는 인원이었다. 그들이 모두 관리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관리로 변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민간인이라고 하더라도 자치제에 참여하여 식민통치의 운영에 기여하였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직접식민통치에서 자치제 실시는 식민통치의 통로를 넓혀주는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간접 식민통치에서 자치제 실시가 민족공간을 넓혀 준 경우와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도의 독립운동은 민족공간을 넓혀주는 자치제 획득을 주요 목표로 했지만 한국독립운동에서는 자치제를 배격했다.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이나 전략이 식민조건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직접 식민통치의 필요에서 지방행정의 구조를 개혁하여 조선시대에는 郡(부·목·군·현)을 중심으로 지방을 통치하여 里洞 자치제가 발달하고 있던 것을 面 중심체제로 바꾸어 식민통치가 그 동안의 이동 자치기능을 봉쇄하면서 식민적 신질서를 수립해 간 점에 대하여 유의할 필요가 있다. 총독부의 조선인 관리라고 해도 고관은 많지 않았지만,466)조선총독부의≪제86회 帝國議會 說明資料≫(1944, 12쪽)에 조선인 고관이 소개되어 있다. 총독부 학무국장(武永憲樹-嚴昌燮), 학무국 사회과장, 관방조사과장(최하영), 재무국 연초과장, 광공국 근로조정과장, 경찰에서 도 경찰부장 1명(尹鍾華), 도 고등과장 1명, 도 형사과장 1명, 도 수송보안과장 6명, 경찰서장 3명, 도지사 5명(平松昌根-李昌根·中原鴻洵-劉鴻洵·金大羽·山本文憲-宋文憲·增永弘-朴在弘), 도 내무부장 1명, 도광공부장 7명, 도농상부장 6명, 도재무부장 5명으로 나타나 있다. 면제 행정을 통하여 지방에서 새로운 식민지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 전율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시골 읍면에는 일본인 순사와 교원이 빠짐없이 파견되어 있었고, 그들은 농가지도의 이름으로 식민교육뿐만 아니라 식민행정을 돕고 감독하고 있었다.467)1932년 전라남도 학무과장으로 재직한 遠藤柳作은 당시의 학무행정을 “(교원이)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게 했어요 … 당시 조선에서 초등교육은 가정교육 사회교육 학교교육도 모두 담당한다는 정신으로 졸업생의 집을 하나하나 돌며 … 기를 쓰며 지도했어요”라고 1959년에 회고하였다(宮田節子, 앞의 책,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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