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식민지 개발과 식민통치에서 종교를 선두주자로 출동시켜 교회를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기 때문에 아시아인은 제국주의 경제와 종교와 군대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보았다. 아편과 성경과 총칼을 놓고 어느 것이 진리인지를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모두를 아편으로 보았다. 그와 같이 서양 종교는 아시아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인의 양심을 기독교 양심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아시아인의 양심을 배반했다. 어떤 종교가 되어도 토착사회의 양심을 배반하면 선교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달랐다. 그 이유는 구한말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외래 종교 회유책에 힘입어468)金翼漢,<1910년 전후 山縣, 伊藤系의 對韓政策 기조와 종교정책>(≪韓國史硏究≫114, 2001), 49쪽. 일본 침략에 동조한 경우가 없지 않았던 기독교가 식민지시기에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기독교 선교와 기본적으로 모순되었던 이유는 일본은 神敎를 국교로 하고 있었고, 신교를 통치이념으로 포교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15년 사립학교령을 개정하여 선교학교의 교과과정에서 ‘성경’시간을 두지 못하게 했다.
일본은 신교를 종교로 한정하지 않고 통치이념으로 현실화하여 운용하였다. 그러한 신을 신앙하고, 그 신의 실존적 실체가 덴노(天皇)라고 했다. 그래서 덴노는 신이면서 국왕으로 군림해 있었다. 그에 따라 일본국 백성은 그러한 신의 종으로 존재한 동시에 臣民으로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 철통종교체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강요되었다.469)남산에 朝鮮神宮을 건립한 것을 비롯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행정조직을 이용하여 그들의 神社를 설치하였다. 심지어 학교마다 신사(봉안전)를 설치하여 조회시에 배례를 올리고 그 앞을 지날 때 마다 배례하도록 강제하였다. 교실에는 덴노의 궁전 사진을 정면에 게시하여 우러러 보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5년부터는 학생을 통해 가정에 가미다나(神棚)라고 하는 ‘귀신집’을 배부하여 그것을 신성한 곳에 두고 가족신앙으로 믿도록 강요하였다. 식민지 조선 전체를 신교 조직으로 얽어매고 있었다.
그러한 신교조직과 쌍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군국주의의 군대조직과 군사문화였다. 1906년에 설치한 한국주차군사령부가 강점기에 조선군사령부로 개편되고 그의 군부대가 전국에 배치되었던 것도 그것이지만, 1906년에 확정한<帝國國防方針案>에 따라470)1906년의<帝國國防方針案>은 그해 伊藤博文이 한국 통감부의 통감으로 부임함에 따라 정치 주도권을 경합하고 있던 山縣有朋이 해외 경략은 육군이 주도하여 추진한다는 원칙을 덴노로부터 재가를 받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井上淸,≪日本 歷史≫下, 岩波書店, 1966, 91쪽). 일본의 해외 진출은 중국을 향할 것, 군 통수권의 독립, 군부대신의 무관제, 관동도독부 도독과 장차의 조선총독의 장군임명, 조선의 중국침략의 전진기지화를 노리고 있었다(91∼92쪽). 국방방침안은 山縣이 1922년에 사망한 뒤에도 존속하여 1923년에는 상상 적국을 미국·러시아·중국으로 순서를 정하고 있었다. 조선총독은 육해군 대장이 맡아 군사통치 방식의 식민통치를 강행하였다. 군사통치의 정치적 오류를 방지하기 위하여 총독 밑에 민간 정치인으로 정무총감을 두었다. 아울러 총독은 입법·행정·사법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1925년부터 중학교에 배속장교를 배치하여 학생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학교에 군대 윤리가 지배하도록 했다. 학교의 상하급생이 군대 계급처럼 질서를 강요한 나라는 식민지 조선뿐이었을 것이다. 그의 잔재는 해방 후의 군사문화와 유착하여 아직도 남아, 뜻있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
식민지에서 군국주의적 지배가 정착하면서 1930년대부터 식민지 조선을 파쇼체제로 재조직할 수 있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 전국을 군대 조직처럼 계열조직으로 묶으면서 군복같은 국민복을 입고 군가를 부르는 파쇼군단의 생활 강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한 강압 속에서 대중사회의 민족 역량이 크게 감퇴하였고, 그래도 민족을 외우며 살던 개량주의들이 친일파로 전락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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