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5. 근현대
  • 2)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독립운동
  • (1) 일제의 강점과 식민통치의 기조
  • 바. 다액의 통치비용 지출

바. 다액의 통치비용 지출

 이상과 같이 일본은 조선에서 본국인 생활에 맞는 특수 경제를 꾸미고, 민족동화를 위해 식민문화를 만들고, 그들의 특수 종교인 신교와 군국주의체제를 건설하고, 그를 위한 직접통치를 완수하고, 식민성 봉건체제까지 갖추자면 인건비도 그것이지만 다양한 비용이 투자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통치비용이 많이 지출될 것은 당연했다. 그것을 식민지인의 복지나 개발비 때문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1920년대에 산미증식계획을 강행하면서 토지개량이라 하여 밭을 논으로 만드느라 수많은 농민을 괴롭혔다. 쌀 단작으로 본국인의 미곡수요를 충당하면서 농업통제의 능률을 높일 수는 있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쌀 단식의 생활을 심었다. 아울러 오늘날 특용작물 재배를 위하여 논을 밭으로 역개발하는 현상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도 미곡증산이 두 배에 이르렀다고 개발 효과를 자랑하는데 인구가 1천만이나 증가하여 노동력 상승에 의한 생산력 증대와 극단적 착취에서 생존에 몸부림치는 사람은 최대의 생산력을 발휘한다는 ‘죽음을 담보한 생산력 증대’라는 교훈도 생각해야 한다.

 한편 적지 않은 예산을 쏟아 많은 학교를 설립했다고 말한다. 대한제국이 망하던 1910년에 사립학교가 학부의 인가를 받은 것이 2,250개교가 있었다. 그것이 식민지가 되면서 절반도 남지 못하였다. 또 조선 후기부터 농촌 마을에까지 설립되어 교육의 대중화에 기여하던 書堂도 여러 가지 핑계로 폐쇄하거나 변질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별도로 학교를 설립했다고 해도 그것은 민족동화를 목표한 식민교육의 학교였다. 교육이 오히려 해롭다는 교육원리가 적용될 그런 교육이었다.472)臺灣에서 1939년부터 의무교육을 추진하여 1941년에 대만교육령을 개정 공포하여 1943년 4월부터 6년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대만에서 황민화교육은 크게 성공하여 지금도 대만인은 일본의 식민교육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조동걸,<대만의 표리>,≪그래도 역사의 힘을 믿는다≫, 푸른역사, 2001). 그런데 당시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의무교육을 추진했던 田中武雄(1942. 5. 29∼1944. 7. 15)은 의무교육이 징병제 실시와 조선인의 요구를 막을 수 없어 실시하기는 해도 민족의 속성상 혹은 국가도 생물과 같은 優勝劣敗의 법칙이 지배하므로 독립운동에 기여할 것이라고 회고하였다(宮田節子, 앞의 책, 150∼153·162쪽). 그래서 조선에서는 문맹정책과 의무교육의 양극단론이 부침을 거듭했다.

 그래도 거액의 예산을 투자하여 철도를 부설한 것은 식민지를 크게 개발한 증거라고도 말한다. 철도 같은 간접자본의 개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수탈의 도구로 개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수탈 도구는 해방 후에 유익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을 문제 삼는다면 도적이 도적질할 때 사용한 사다리를 가지고 가지 못했다고 해서 후일 사다리 타령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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