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의 반성으로 부상한 인도주의와 신인문주의 사조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의 영향도 있고 군국주의 강경파인 야마카타(山縣)계 테라우치(寺內)내각이 물러나고 민정파 정우회의 하라 케이(原敬)내각의 등장과 함께(1918. 9∼1921. 11) 잠시나마 대정 데모크라시가 세력을 얻는 듯 했다. 아니라고 해도 1910년대에 식민통치 기반을 완성했다면 굳이 무단통치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관료조직을 통한 수탈의 극대화에 주력할 차례였다. 그때에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민족적으로 전개되자 무단통치를 후퇴시켜 ‘문화정치’라는 관료수탈체제를 수립했다. 그러한 수탈체제는 국제적으로 베르사이유 안정기조가 보장해 주었다. 베르사이유체제는 제국주의 안정체제였다. 그러므로 문화정치가 도전을 받으면 언제나 폭력을 동원했다. 1920년의 경신(간도)참변이나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의 참상이 문화정치 속에서 자행된 폭력이었다. 1925년에<치안유지법>을 발포하고 동시에 중학교에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국주의의 본색을 드러낸 것도 그의 단면이었다. 1920년대에는 일제의 회유분열정책이 어느 때보다 극성스럽게 자행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경제공황이 닥치고 있던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산미증식계획·<치안유지법>·조선농회·조선철도국·조선신궁·경성제국대학·조선사편찬위원회에 이어 조선사편수회와 조선사학회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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