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구석기문화는 일반적으로 石刃석기가 제작되기 시작하여 홍적세가 끝나고 충적세시대가 시작되는 시점 이전 시기의 석기문화를 말한다. 중기 구석기문화와는 달리 이 시기의 석기문화는 기법상의 뚜렷한 차이가 있고 다양한 생활도구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쉽게 구분된다. 현재 중국에서는 후기 구석기문화를 대략 5만년 전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약 23개 성과 시의 약 100여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중기 구석기문화에 비하여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었거니와 석기문화의 지역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시기인데 남북간의 석기공작전통이 달라질 뿐 아니라 남부에서는 대형석기가 그대로 잔존하는 유적과 소형화하는 유적과의 차이를 보이고 있고 북부에서는 소형석기와 석인을 위주로 하는 소석기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북방의 소석기 위주의 문화전통으로 주구점문화를 계승한 峙峪석기문화전통을 대표로 꼽고 있는데 감숙성에서부터 내몽고의 살라우수(Sjara-Osso-gol)유적을 거쳐서 길림성의 周家油坊유적에까지 분포하고 있다. 이 석기전통의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치곡유적은 산서성의 북쪽 대동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살라우수동물군이 나타나고 있고 탄소연대는 28,000년 전후로 나타났다. 이 유적에서는 이전의 유적에서 나타나지 않던 화살촉형 석기, 도끼형 칼 그리고 작은 석인들이 발견되었는데 석기들이 정련된 기법으로 가공되고 있으며 양극타격에 의하여 형성된 석핵과 박편들이 소량 존재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석기는 쳐트를 주요한 석재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외에도 석영암과 규암이 섞여 있으며 긁개·조각도 그리고 첨두기가 주요한 가공된 석기들이다. 이 치곡문화는 석기문화의 양상으로 보아 중기 구석기문화인 허가요의 문화와 흡사한 면을 볼 수 있는데 이 두 유적은 가까운 거리에 있을 뿐 아니라 시기적으로 약 수만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치곡유적이 허가요문화를 이어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265)Jia, Lanpo and W. W. Huang, On the Recognition of China's Paleolithic Cultural Traditions, Paleoanthropology and Paleolithic Archaeology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ed., by W. R. and J. W. Olsen, Academic Press, 1985, pp. 259∼266. 이 치곡석기공작은 이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군이 초원성이 많고 맹수가 적어서 초원에서 사냥을 하는 경제를 영위하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小南海문화는 하남성 안양 부근에 있는 유적으로 25,000년 전부터 10,000년 전에 형성된 유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유적에서도 살라우수동물군에 근접하는 동물구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 지역은 남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현재와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석기들은 수만점이 되고 있으나 대부분이 석핵과 석편들이며 제2차가공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극히 적다. 소수의 석기공작에는 긁개·첨상기·석추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양극타법에 의한 석편들이 관찰되기 때문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 석기공작이 주구점의 석기공작전통과 통하는 것이며 또한 소석기전통의 한 변형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주구점유적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석기문화가 하북성 일대에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산재하여 있었다고 하는 것인데 왜 그러한 문화가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주구점의 山頂洞유적은 주구점유적의 최상층, 즉 제1층의 상면에 있는데 이 유적에서는 석기의 출토는 많지 않으나 무덤과 골침·장신구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인공의 흔적이 보이는 소석기문화전통을 보이는 석기 25점이 보고되었는데 이 석기들 중에는 양극타격법에 의한 석기들이 다수 있어서 주구점석기문화의 전통을 보이고 있다 하겠으나 이 산정동유적이 주구점의 제1층을 바닥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제1층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고 보고 있다.266)張森水, 앞의 책, 225쪽. 몇 가지의 중요한 고인류생활에 대한 내용을 산정동유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매장풍습에 관한 것이다. 이 매장에서는 붉은 점토를 사용하는 등의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당시 인류의 사유와 인간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매장된 사람들이 남녀노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때 이는 당시의 사회조직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장신구를 제작할 때 구멍을 뚫는 기술은 마연하는 기술과 함께 이전에 없는 도구제작법으로 이 시기에 출현한 신기술이다. 이 산정동문화는 동물의 구성이 거의 현생종인데 이 중에는 현재 장강 이남에 살고 있는 種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가 현재보다 따뜻하였다는 결과가 되는데 탄소연대 10520±360BP의 연대가 보다 정확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주구점의 산정동문화는 요령의 海城縣 仙人洞유적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산정동과 흡사한 골기와 장신구들이 출토되고 있다. 선인동의 석기들은 대부분 석영암으로 제작되었는데 이외에도 쳐트·사암과 화성암 종류의 석재도 나타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석기들이 조악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긁개·첨두기·찍개 그리고 조각기 등이 보고된 바 있다.
후기 구석기문화 중에서 돌날(石刃)기법석기공작 역시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데 흑룡강에서부터 영하자치구까지 이르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산서성의 下川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水洞溝문화는 영하 회족자치구인 靈武縣에 있는데 석기들은 규질의 석회암으로 만들었는데 수동구의 석기들은 이 시기의 석기공작으로서는 비교적 큰 편에 속하며, 도구들 중에는 원추형의 석핵, 반원형의 날을 가진 긁개와 삼각형의 첨두기 등이 특징적인 유물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무스테리안첨기나 오리냐시안형 긁개와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수동구 석기문화는 탄소연대측정의 범위가 대략 2만년 전후로 고동물의 편년과 대체로 부합되므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화가 서구의 석기문화와 유사한 점에서 동서의 문화교류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주목을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산서지방의 하천문화는 후기 구석기문화로 전형적인 세석기문화이다. 이 석기공작에는 간접타격과 가압법에 의한 석기가공이 흔하게 보이고 쐐기형석핵과 원추형석핵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보이는 석기들로서는 긁개·첨두기·손잡이가공 칼·조각도·석추 이외에 석촉으로 보이는 석기도 있다.
이러한 세석인문화-즉 쐐기형 또는 원추형의 석핵이 존재하고 가압법에 의한 가공으로 첨두기나 이른바 월계수잎형의 첨두기가 존재하는 문화-들은 황하의 여러 지점에서 발견되는데 이러한 지점들의 연대가 대략 홍적세의 최말엽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문화는 수동구에서 보이는 소석기문화들보다도 훨씬 발달한 것이다. 산서와 하북의 경계지역에 있는 虎頭梁유적에서도 강안단구퇴적의 상부에 쌓인 황토퇴적 속에서 세석인을 포함하는 문화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의 탄소연대는 약 1만 1천년 전으로 드러났는데 석기공작이 홍적세의 말엽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267)Jia, Lanpo and W. W. Huang, 1985, The Late Palaeolithic of China, Paleoan thropology and Paleolithic Archaeology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ed., by Academic Press, 1985, pp. 211∼223.
중국의 남부지방에서는 대단히 많은 지점에서 후기 구석기유적이 확인되고 있지만 간접타격을 사용한 석기공작이 아직 발견되지 않는데, 대체로 석기공작의 기법상 정체성이 나타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남부지역에서도 골기나 각기가 나타나고 있지만 예술품으로 보이는 것은 극히 적은 편이다. 사천성의 銅梁에서 발견된 석기공작은 호수 바닥의 니탄층에서 발견되었는데 대략 2만년 전후의 절대연대가 나왔다. 석기들은 규암이나 쳐트를 직접타격 또는 대석법을 사용하여 제작한 긁개·첨두기 그리고 찍개 등이 나타났는데 대부분 6㎝가 넘는 것들이다. 석기들은 몇 부위에 간단한 가공으로 경사가 급한 날을 세워 만들었는데 이는 석기들의 기능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전기 구석기적인 특징이 남아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268)張森水, 앞의 책. 또 다른 문화로 사천성의 富林문화를 들 수 있는데 이 석기공작은 하안단구에서 발견되었는데 동물의 구성으로 볼 때 후기 구석기의 마지막 단계로 보이며 탄소연대측정의 결과 중국학자들은 2만 5천년 전으로 보고 있다.269)張森水,<富林文化>(≪古脊椎動物與古人類學報≫ 15-1, 1977), 14∼27쪽. 석기들은 대부분 플린트나 석영암으로 제작되었는데 석편과 석핵이 다수이고 석기로는 긁개가 주류를 이루고 첨상기나 조각도도 포함되어 있다. 이 석기공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석기가 소형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방의 소석기문화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북방의 소석기문화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독자적인 발달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석기공작의 구성으로 보아 일시적인 석기제작소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유적에서 출토된 밤 등의 씨앗으로 보아 가을에 일시적인 캠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270)張森水, 앞의 책.
귀주의 猫猫洞동굴에서 석기가 발견되었는데 인골파편과 함께 4천여 점의 석기가 채집되었다. 석기들은 사암이나 규질암으로 제작하였는데 주로 박편에 약간을 가공한 것들이 많다. 중국학자들은 이 석기공작이 북중국의 수동구석기공작, 하북의 호두량석기공작과 통하는 것인데 석기공작들은 불량한 석재로 인하여 원시적인 특성을 보인다. 골각기가 다수 보이고 뼈송곳·뿔창 그리고 칼 등이 보이며, 골각기의 제작기법은 상당히 발달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유적은 우라늄시리즈기법으로 14,600±1,200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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