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Ⅱ. 신석기문화
  • 2.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2) 신석기시대의 유적
  • (1) 집터
  • 나. 돌깐집터

나. 돌깐집터

 신석기시대에 일정한 범위에 돌을 깔아 만들었던 집터가 춘천 내평리509)崔夢龍,<內坪里住居址(敷石住居址)>(≪八堂·昭陽댐水沒地區 遺蹟發掘綜合調査報告書≫, 1974).와 강화 삼거리510)金載元·尹武炳,≪韓國支石墓硏究≫(國立博物館 古蹟調査報告 6, 1967).·평양 청호리유적511)笠原烏丸,<櫛目文土器を發見せる北鮮淸湖里遺蹟に就いて>(≪人類學雜誌≫ 51-5·6, 1936).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내평리유적은 소양강의 강안단애에 위치하고 있는데 유구는 동서 길이 12.3m, 남북 길이 4m 정도의 범위에 25∼30㎝ 크기의 돌을 깔아 만든 집터로서 동반부만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동반부의 중앙부 아래에서는 10∼15㎝의 잔돌로 구획된 1.3∼1.5m의 타원모양의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화덕자리 내부의 흑색부식토를 걷어내자 15㎝의 잔돌이 깊이 18㎝까지 둥글게 깔려 있었다. 이외에도 집터의 북동과 동쪽에서는 8기의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15∼20㎝ 정도의 돌을 둥글게 또는 타원모양으로 깔아 만든 것이며 크기는 48㎝×40㎝∼160㎝×160㎝ 정도이다. 이 가운데 한 곳에는 남쪽으로 1.1m×0.6m, 깊이 25㎝ 정도의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화덕자리는 집터와 관련된 야외화덕자리로 보고 있다.

 삼거리집터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고인돌발굴조사 때 주위에 트렌치를 넣으면서 발견된 것으로 표토 아래에 40∼50㎝ 두께의 흑색토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층의 서쪽으로 크고 작은 돌들이 깔려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교란이 심하고 발굴면적이 제한되었으므로 전체적인 성격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대개 내평리·청호리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물로는 빗살무늬토기조각이 돌 사이에서 출토되었는데 작은 모래알이 섞인 점토질계 바탕흙으로 빚어진 것이다.

 청호리유적은 대동강안의 사구에 위치하고 있는 포함층으로서, 층위는 5개의 자연층위로 구분할 수 있으며 집터는 최하층인 모래층(Ⅳ층)에서 발견되었다. 형태는 1변의 길이가 1.8m 정도 되는 네모꼴의 범위 안에 편평한 돌이 깔려 있는 것으로서 집터 가운데에 돌을 돌려 만든 화덕자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한편 일본 죠몬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집터에서도 둥글거나 타원모양의 돌깐집터가 발견되었는데 가운데에 화덕자리가 설치되어 있다.512)韓炳三 外,<昭陽江水沒地區 遺蹟發掘調査>(≪八堂·昭陽댐水沒地區 遺蹟發掘綜合調査略報告≫, 文化財管理局, 1974), 462쪽.

 따라서 돌깐집터는 움집에서 지상주거로 바뀌는 과도기의 집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내평리와 삼거리의 경우는 완형이 아니고 기둥구멍 등 집터로 볼 만한 확실한 시설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일반적인 살림집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경우에만 이용되었던 시설물로 생각할 수도 있다.513)安承模,<한강유역의 신석기문화>(≪한강유역사≫, 민음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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