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Ⅱ. 신석기문화
  • 2.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3) 신석기시대의 유물
  • (1) 토기
  • 라. 토기제작

라. 토기제작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유물이 토기(질그릇)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사용된 질그릇이 누구에 의해 일년 중 어느 시기에 무슨 연장을 가지고 얼마 만한 품을 들여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그다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같은 문제들은 신석기인들의 생활에서 질그릇이 차지한 비중을 제대로 가늠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신석기시대 질그릇에 남아 있는 자국들을 분석하고 옹기점의 작업과정627)鄭明鎬·Eddy, R. I.,<韓國 甕器店의 作業과정에 대하여> 上·下(≪考古美術≫ 119·120, 1973), 8∼17·11∼21쪽.을 참고하여, 그릇제작에 사용된 연장과 만든 시기를 가늠해 보려 한다. 그리고 일정한 크기의 물그릇(갓 만들어 낸 젖은 상태의 그릇)을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과 드는 재료의 양을 재고, 신석기시대의 한 마을에서 연간 필요한 그릇의 수량을 추리하여 토기제작(질그릇만들기)에 든 품과 주인공이 누구였겠는가를 헤아려 보려 한다.

가) 연장

 신석기인들이 질그릇을 만들 때 사용한 연장으로 무엇이 있었을까. 잔이나 공기 정도의 작은 그릇은 두 손만으로도 만들기가 쉬웠겠지만, 그릇살을 고르게 하거나 겉면을 다듬으려면 맨손만으로는 불편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나아가 큰 그릇들을 만들 경우 제법 여러 가지 연장이 쓰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질그릇제작에 쓰인 연장으로 이제까지 알려진 것은 돌이나 뼈로 만든 무늬넣개(시문구)와 그리고 밑가새 또는 못가새로 여겨지는 종류가 있을 뿐이다(<그림 1>). 이 밖의 연장들에 대해서는 질그릇의 겉면에 남아 있는 자국을 통해서 그 종류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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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여러 유적에서 나온 무늬넣개와 밑가새(4)
<그림 1>여러 유적에서 나온 무늬넣개와 밑가새(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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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뾰족밑과 둥근밑에서 둥글게 눌린 돌림자국들과 단이 져 있는 모습, 동심원을 이루어 나타나는 흠집자국들과 넓은잎자국, 납작밑에 찍혀 있는 넓은잎자국들이 눈길을 끈다. 잘 알다시피 질그릇은 찰기가 있는 젖은 흙으로 만들기 때문에 바닥면이 잘 달라붙고, 떼어내려면 흙이 묻어나 바닥면이 손상 되기 쉽다. 그리고 벽을 쌓을 때 바닥을 돌리면서 태림(테)을 붙여야 하는데, 이 때 바닥이 상하거나 또는 원하지 않는 것들이 달라붙는다. 이같은 문제들을 해결한 방법이 바로 그릇밑에 자국으로 남아 있다. 곧 뾰족밑과 둥근밑에 남은 자국들은 「둥근 받침통」 또는 「또아리 모양의 받침대」에 바닥을 놓고 벽을 쌓는 과정에서, 그리고 넓은잎자국은 받침대의 윗면과 그릇밑이 들러붙지 않게 하려고 놓은 「나뭇잎」이 자국으로 찍힌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또 납작밑의 넓은잎자국도 그릇의 바닥면이 작업장의 바닥에 들러붙어 훼손되는 바를 피하려고 받쳤던 잎의 자국으로 여겨진다(<사진 1>).

 이같은 추리는 실제 복원해 보았을 때 같은 자국들이 생겨 입증된다.628)이기길·황성옥,<암사동(바위절)유적의 신석기시대 뾰족밑무늬토기의 연구>(≪孫寶基博士停年紀念 考古人類學論叢≫, 1988), 275∼339쪽.
―――,<동삼동유적에서 나온 신석기시대 덧문지른무늬토기의 연구(1)-물그릇만들기를 중심으로->(≪古文化≫ 34, 1989), 3∼32쪽.
―――,<신석기시대 납작밑토기의 연구-납작밑의 제작기법과 분석->(≪東方學志≫ 68, 1990), 33∼74쪽.
따라서 신석기시대 동안 물레나 돌림판은 사용되지 않았으며,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은 둥근 통이나 또아리 모양의 받침대 그리고 넓은잎이었다. 이 사실은 일부 주장629)황기덕,≪조선 원시 및 고대사회의 기술발전≫(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 27쪽.처럼 그릇을 엎어서 아가리부터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세워 놓고 바닥부터 만들었음을 가리킨다.

 그릇의 안쪽 면에 나란히 긁힌 줄 자국들이 잘 남아 있는 예가 많은데, 이것은 울퉁불퉁한 그릇살을 고르게 다듬은 자국으로, 「근개」630)鄭明鎬·Eddy, R. I., 앞의 글, 11∼21쪽.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근개질 자국이 보이지 않고 고운 줄 자국들로 덮여 있는 안쪽 면도 적지 않다. 바깥 면은 흔히 매끈하며 무늬가 넣어져 있다. 이는 근개질한 뒤 물손질로 겉면을 곱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가리 전에서 고운 줄자국들이 관찰되는 것은 헝겊이나 가죽에 물을 묻혀 전의 모습을 잡은 결과이다. 따라서 오늘날 「물가죽」631)金眞宇,<韓國 甕器工房의 實態硏究-製作技法·用語를 중심하여->(弘益大 碩士學位論文, 1972), 1∼85쪽.이라 부르는 것이 당시에도 사용되었다고 하겠다(<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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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그릇에서 볼 수 있는 자국들과 그 자국을 남긴 연장 또는 물체
<사진 1>그릇에서 볼 수 있는 자국들과 그 자국을 남긴 연장 또는 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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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뾰족밑이나 둥근밑은 빚기로 만들지만 납작밑은 질흙을 둥근판 모양으로 만든 뒤 원하는 크기로 잘라야 한다.632)이기길·황성옥, 앞의 글(1990), 33∼74쪽. 또 벽을 다 쌓은 뒤 아가리 전을 잡을 때 대개 그릇살의 높이가 들쭉날쭉하므로 같은 높이로 잘라야 한다. 이 경우 오늘날 밑창부분을 자를 때 쓰는 「밑가새」와 얇은 그릇살을 벨 때 사용하는 「못가새」633)金眞宇, 앞의 글.와 같은 연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사진 1>).

 끝으로 자의 역할을 하는 「정금대」634)金眞宇, 위의 글. 같은 것이 신석기시대에도 있었을까. 북한에서는 남경유적에서 나온 뾰족밑그릇을 논하면서 그릇 높이가 14㎝ 단위로 일정한 비례를 보이기 때문에 14㎝가 당시 질그릇제작의 기준 크기였고, 나아가 이 크기는 여성들의 한 뼘에 해당한다고 보아 질그릇을 만드는데 여자들이 중심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635)김용간·석광준,≪남경유적에 관한 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 68∼69쪽.

 그러나 익은그릇(가마에서 구워 낸 그릇)에서 14㎝가 물그릇일 때 15.5㎝쯤되므로 기준 크기는 15.5㎝라고 해야 그들 논리에 맞는다. 오늘날 여대생 27명의 한 뼘을 재어 보면, 크기는 16.5∼21.0㎝로 나타나고 이 가운데 18∼20㎝인 사람이 22명이다. 이런 점에서 여자의 한 뼘이 기준되는 크기였다고는 인정하기 어렵다. 다만 질그릇의 크기 차이가 일정한 비례를 보이고 대·중·소로 표준화된 경향을 띠므로,636)任孝宰·Nelson, S. M.,<漢江流域 櫛文土器의 容量抽出과 그 文化的 意味>(≪韓國考古學報≫ 1, 1976), 117∼121쪽. 신석기시대에도 정금대와 비슷한 연장이 쓰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 시기

 신석기인들은 질그릇을 언제 만들었을까. 이 문제는 재료 마련, 물그릇만들기, 말리고 굽기에 알맞은 절기를 꼽아 보면 쉽게 풀 수 있다.

 질그릇의 주 재료인 생질(찰흙)을 캐고 운반할 때, 생질이 얼었거나 젖어 있으면 캐기가 나쁘거니와 또한 물의 무게가 보태져 퍼담거나 나르기 힘들다. 따라서 자연 추운 겨울이나 비 많은 때를 피했을 것이다. 한편 물그릇을 겨울에 만든다면 흙이 얼어 작업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므로, 따뜻한 계절이 알맞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질그릇의 제작시기를 알려주는 뚜렷한 증거는 그릇바닥에 찍혀 있는 넓은 잎자국이다. 나뭇잎자국이 남아 있는 납작바닥의 지름은 4.3∼10.5㎝의 크기이므로 보통 이보다 더 큰 나뭇잎이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그만한 크기의 넓은잎은 잎이 한창 자란 늦여름부터 잎이 지기 전인 가을 사이에 얻을 수 있으므로, 질그릇은 늦여름과 초가을 즈음에 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물그릇이 완성되면 겉과 속, 위와 아래 등을 골고루 바짝 말려야 한다. 그런데 말린 시간이 너무 차이 나는 날그릇(물그릇을 잘 말린 상태의 그릇)을 함께 구울 경우 파손율이 높으며, 구워낸 그릇이 습기찬 공기나 겨울의 찬 공기에 급히 식으면 금이 많이 생겨 불량품이 많아진다고 한다.637)新井司郞,≪繩文土器の技術≫(中央公論美術出版, 1973), 1∼123쪽.

 이처럼 질그릇만들기는 사시사철 언제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추운 겨울이나 비 많은 계절은 부적합하며, 날씨가 맑고 기온이 따스한 늦여름에서 초가을이 가장 적기였다고 생각된다.

다) 품

 질그릇 만드는 과정은 재료의 마련, 물그릇만들기, 말리기와 굽기 등 크게 3단계로 나뉜다. 재료의 마련에는 찰흙을 캐어 운반하고, 비짐을 구하며, 캐온 찰흙에서 잡물을 골라 낸 뒤 비짐을 알맞은 비율로 섞어 기포가 빠지도록 잘 반죽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물그릇만들기는 질흙과 연장들이 갖춰진 상태에서 그릇꼴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말리기와 굽기단계에는 땔감의 마련, 가마만들기, 그릇 운반에 노동력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물그릇 만드는데 드는 품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높이가 30∼40㎝쯤 되는 중간 크기의 그릇을 도예가의 손을 빌어 실험 제작해 보니 3∼4시간 정도 걸리고, 재료의 양은 5.2㎏쯤 들었다.

 물그릇만들기와 말리기 및 굽기는 연속되는 작업이어야 하므로, 한 해에 필요한 양을 한꺼번에 만들어야 효율성이 높다. 따라서 물그릇제작에 든 품을 따지려면 한 마을에서 연간 몇 개의 질그릇이 필요했는가를 셈해야 한다. 이 문제는 한 집에서 사용되는 질그릇의 종류와 개수, 종류별 질그릇의 수명 그리고 한 마을을 이루는 집의 수를 어림해야 추정이 가능하다.

 먼저 집자리가 조사된 유적 가운데 온전한 집자리에서 나온 질그릇의 최소 개체수를 살펴보자(<표 1>).

유 적 최 소
개체수
집의 크기(m) 비 고 문 헌


1호 7 4.4×5.2   韓永熙,<韓半島 中西部地方의 新石器文化>(≪韓國考古學報≫ 5, 1978), 17∼108쪽.
2호 6 4.2×4.5 5,000±70BP
4호 8 4.4m 이상 4,730±200BP
5호 7 5.0×4.2(?) 4,610±200BP
10호 6 4.2×3.9 5,510±110BP


1호 30이상 7.35×7.0 복원된 것만 30개체 도유호·황기덕, 앞의 책.
2호 5이상 4.0 ×3.7 그릇 조각만 1,062점
3호 2이상 4.0 ×3.8 그릇 조각만 483점

12호 3이상 7.0×3.7(일부) 신석기 늦은 시기 김용간·석광준, 앞의 책.
31호 120 13.5×8.4
37호 3이상 4.5×3.5



A

1호 2 2.6×2.7 V-1층, 부속시설 任孝宰·權鶴洙,≪鰲山里遺蹟≫(서울大博物館, 1984), 1∼120쪽.
2호 5 7.2×5.9 V-2층, 6,080±210BP
3호 1 6.8×5.5 V-3층, 5,740±210BP
4호 4 7.0(원형) V-3층, 5,740±210BP
5호 2 ? V-4층
7호 7 4.0(원형) V-5층 金元龍·任孝宰·權鶴洙,≪鰲山里遺蹟≫Ⅱ(서울大 博物館, 1985), 1∼76쪽.
8호 1 4.1×3.4 V-7층, 6,130±50BP


9호 4∼5 12.0×6.0 신석기시대 제Ⅰ기층 김용간·서국태,<서포항 원시유적 발굴보고>(≪고고민속론문집≫4, 1972), 31∼153쪽
3호 30 4.4(원형) 신석기시대 제Ⅱ기층
26호 18 3.1×2.8
 
신석기시대 제Ⅲ기층,
     저장움

 
7호 23이상 6.2×6.0 신석기시대 제Ⅴ기층
16호 6이상 3.2×2.8

<표 1>여러 유적의 집자리에서 나온 질그릇의 최소 개체수

 위<표 1>의 사례에서 보면, 한 집당 보통 4개 이상의 질그릇이 갖춰져 있었다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

 이제 문제는 질그릇의 수명과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의 수를 추정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는 이가 있다.638)江坂輝彌,≪考古學の知識≫(東京美術, 1986), 1∼135쪽. 즉 질냄비나 질화로는 매일 사용할 경우 대개 3개월쯤 쓰면 갈라지거나 터져 못쓰게 되므로, 신석기시대에 요리용으로 사용된 질그릇의 수명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한 집에서 요리용으로 쓰는 질그릇의 최소수를 주식용과 부식용의 2개로 셈해서 1년에 8개, 여기에 식기용이나 저장용으로 최소 2개를 더해 한 해에 10개 이상의 질그릇이 필요하다고 셈했다. 그리고 죠몬시대의 한 마을은 10∼15호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여 10집을 기준하면 연간 최소한 100개의 질그릇이 소요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질그릇제작에 드는 품의 하한선을 셈하려 할 때 이러한 추정을 우리의 경우에 적용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폈듯이 죠몬마을의 질그릇 개수보다 더 많은 양을 우리의 신석기인들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 마을에서 일년 동안 필요한 질그릇의 최소량을 100개로 가정하면, 물그릇만들기에 드는 품과 재료의 양은 앞에서 실험 제작했던 중형 그릇의 제작시간과 재료의 양을 기준하여 다음과 같이 셈을 하게 된다. 당시 하룻동안 일하는 시간을 8∼10시간쯤으로 치면 하루에 3∼4개를 만들 수 있으므로, 숙련가 한 사람이 100개의 물그릇을 완성하려면 30일 정도 걸린다. 그리고 중형의 그릇 하나를 복원할 때 든 질흙의 양은 평균 5.2㎏이므로 100개를 만들 경우 필요한 재료의 양은 최소한 520㎏이나 된다.

라) 만든이

 북한학계는 민속의 사례 그리고 질그릇을 빚을 때 남은 손끝무늬(지문)와 손톱자리가 여성의 것이며, 바퀴모양의 무늬넣개는 가락바퀴를 이용한 것이고 그 가락바퀴로 실낳이를 한 것이 여성이기 때문에, 질그릇을 만든이는 여성이라고 주장하여 왔다.639)김용남,<우리 나라의 신석기시대>(≪고고민속≫ 1967-3), 1∼11쪽. 또한 남경유적의 질그릇 크기가 14㎝ 단위로 비례하며, 이 크기는 여성들의 한뼘 크기라는 점에서 여성이 분명하다고 보고 있다.640)김용간·석광준, 앞의 글. 그러나 질그릇만들기에 관여한 사람들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관점도 있다.

질그릇을 만드는 일은 많은 경험과 숙련된 솜씨를 요구하는 일이었던 만큼 그 일에 능숙한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은 틀림없다.…그러나 신석기시대의 사회적 조건에서 원료를 장만하는 일부터 질그릇을 굽기 위한 연료를 마련하는 일까지의 모든 일을 한두 사람의 전문가가 다 해결할 수도 없었으며…공동로동·공동분배가 사회관계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 하에서 많은 사람의 협력을 요구하며 공동체 성원들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인 질그릇을 만드는 일에 공동체적인 관심을 돌렸을 것은 명백한 일이다(김용간,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 질그릇갖춤새 변천에 보이는 문화발전의 고유성>,≪고고민속론문집≫ 7, 1979, 50쪽).

 앞에서 보았듯이 한 해에 필요한 질그릇제작에 드는 품이 최소 30일 정도이고 재료의 양은 적어도 520㎏이나 되는 점에 비춰 보면, 늙은이나 어린이는 힘이 부칠 터이며 또 여성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마을 사람 누구나 질그릇을 만들 수 있었다면, 깨진 그릇의 바닥 부분을 조리용으로 이용하고 또 수리 구멍까지 내어 사용할641)도유호·황기덕, 앞의 책.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암사동이나 오산리·동삼동유적에서 나온 질그릇들이 몇 가지 그릇꼴로 한정되어 있음은 질그릇만들기가 마을의 몇몇 숙련가를 중심으로 이뤄졌음을 반영하는 자료로 여겨진다.

 오늘날 옹기점의 인원구성을 본다면, 재료가 되는 질을 발견하고 물그릇을 만들며 가마에서 구워내는 일을 맡은 「질대장」, 질을 매질하고 질재기를 만들어 대장에게 건네줄 뿐 아니라 물그릇의 말리기 등을 담당하는 「건아꾼」, 그리고 질밭에서 질을 캐와 잡물을 걸러내고 고작대미로 만들어 움으로 날라오는 「생질꾼」으로 짜여져 있다.642)鄭明鎬·Eddy, R. I., 앞의 글(1973 a·b).

 신석기시대에도 질그릇만들기는 누구나가 아니고「숙련가」가 담당하였을 것이며, 일의 능률을 올리려면 오늘날의 질대장과 건아꾼처럼 최소한의 역할분담이 있었을 것으로 헤아려진다. 그러나 바탕흙·땔감·가마축조용 돌 등을 마련하고 나르는 일은 마을사람들이 도왔을 것으로 생각한다.

<李起吉>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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