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1. 체제정비
  • 2) 소수림왕대의 체제정비
  • (2) 율령반포의 의의

(2) 율령반포의 의의

 소수림왕의 개혁의지와 그것의 추진방향은 불교의 도입과 태학의 설립에서 엿볼 수 있지만, 보다 본격적인 체제정비는 재위 3년(373)에 행해진 율령반포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율령은 중국에서 성립되고 발전한 성문법으로서 律은 형벌법전이고 令은 비형벌적 민정법전으로서 행정법·사법·소송법 등을 규정한 것이다.150)田鳳德,<新羅의 律令攷>(≪서울大論文集≫人文社會科學 4, 1956). 국가를 구성한 다양한 세력집단들마다 개별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고유의 관습법을 하나로 일원화할 수 있는 선진적인 성문법의 보유와 그것에 입각한 체계적인 국가운영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발전을 이루는데 긴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율령제는 중국 주변의 여러 민족에게 전파되었는데,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율령의 기본사상인 유학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또 율령을 시행할 수 있는 국가권력의 강화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배체제가 성립되어 있어야 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이미 태학을 설립할 정도로 유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또 미천왕 이후 진전된 중앙집권화로 인하여 집권국가의 체제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율령을 제정·반포할 수 있는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여건이 갖추어진 이후 당시 고구려에서는 율령을 도입해야 할 필요성도 고조되어 있는 상태였다. 즉 중국대륙과 한반도내에서의 정세변화에 따른 대외관계의 변동에 적절하게 대처하고, 미천왕대 이래 정복활동의 결과 넓어진 영토와 복잡하고 다양해진 국내의 구성원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습법만으로는 효과적인 지배가 어렵게 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발전된 중국의 율령법을 받아들여 체제정비를 도모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율령은 晉의 泰始律令을 모법으로 하여 제정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소수림왕 3년에 반포된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이 남아 있지 않아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존 사서에 남아 있는 율령과 관계된 사료에서 율령의 편목을 추정하고 내용을 정리한 결과, 국가통치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규범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51)盧重國, 앞의 글, 103∼122쪽.

 그런데 중국 주변의 민족들이 율령을 받아들일 때에는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인 국가체제라는 율령제의 기본적 특징을 수용하면서도,152)井上光貞,<律令國家の形成>(≪岩波講座 世界歷史≫6, 1974), 41∼42쪽. 부분적으로는 자국의 실정에 맞게 취사선택하거나 고유의 전통을 살리는 쪽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나라마다 율령제의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했다. 고구려 역시 중국율령을 수용하였지만 독자적인 면을 많이 보이고 있다. 즉 刑을 적용하는데 엄격함이 보이고, 유교사상의 농도가 상대적으로 약한 반면 고구려의 전통적 특질을 상당히 갖고 있는 등 나름대로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153)盧重國, 앞의 글, 176∼182쪽.
韓容根,<三國時代의 刑律硏究>(≪韓國史의 理解≫古代·考古 1, 신서원, 1991), 169쪽.
이것은 고구려가 전통적인 고유법을 온존시키는 가운데 시대에 부응하여 중국 율령의 영향을 받아 고대법체계를 확립시켜 나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154)朱甫暾,<新羅時代의 連坐制>(≪大丘史學≫25, 1984), 9쪽.

 이와 같이 건국 이후 진행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이 집약되어 이루어진 율령의 제정과 반포에 의해 고구려는 비로소 성문법시대로 돌입하였다. 이전의 다원적인 관습법체계를 일원적인 공법체계로 종합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를 계기로 형법관계뿐 아니라 관등제와 관직제, 조세제 및 제사, 喪葬, 學, 樂, 의복 등에 이르기까지 정치운영과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공법체계를 수립하여 성문화함으로써 일정한 기준과 원리하에 국정이 운영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국내의 모든 구성원이 율령에 정해진 규정에 따라 지배를 받게 되어,155)盧重國, 앞의 글.
姜鳳龍,<三國時期의 律令과 ‘民’의 存在形態>(≪韓國史硏究≫78, 1992).
새로 편입된 주민들도 짧은 기간 안에 완전한 고구려민으로 안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고구려인들과 다양한 새 편입민들 사이의 상호 배타적인 면도 보다 완화될 수 있었는데, 이것은 곧 고유성과 전통성을 유지하면서도 개방적이고 국제적 성격의 독창적인 고구려문화를 성립·발전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요컨대 나부체제의 해체 이후 진행된 여러 분야에서의 변화를 수용하여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준거틀을 마련하여, 이를 율령으로 법제화함으로써 변화된 사회상황과 제도 사이의 괴리를 없앴다. 이로써 국가의 발전방향이 명확하게 제시되었고 그에 따라 보다 체계적으로 국가가 운영될 수 있게 되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대를 거치면서 이룩된 고구려의 급속한 발전은 바로 율령정치의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율령제는 이후 정치, 사회적 성장에 따라 몇 차례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발전되어 갔고, 신라에서 율령을 제정할 때에 그 모법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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