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2. 웅진천도와 중흥
  • 2) 무령왕의 활동
  • (2) 무령왕의 왕권안정을 위한 시책
  • 나. 대외관계의 변화

나. 대외관계의 변화

 무령왕대 백제의 대외관계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변화양상은 고구려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웅진 천도 후 백제는 내부의 정정불안으로 말미암아 고구려에 대해 한동안 수세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동성왕대에 이르러 기존의 나제동맹관계를 군사동맹과 결혼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고구려의 남진에 대해 신라와 공동 대응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남진을 충북 청천(薩水原)-진천(母山城)-경북 문경(犬牙城)선에서 어느 정도 저지할 수 있었다.274)金秉柱,<羅濟同盟에 관한 硏究>(≪韓國史硏究≫46, 1984), 44쪽.
鄭雲龍,<5세기 高句麗勢力圈의 南韓>(≪史叢≫35, 1989), 15쪽.
이 시기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주된 공격의 목표로 설정하였으므로, 백제의 경우 동성왕 17년(495) 雉壤城이 침공받은 사례를 제외하고는 고구려와는 거의 소강상태를 이루었다.

 그러나 무령왕은 즉위 초의 정변을 수습한 후 곧바로 고구려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강화하였다. 백제는 남천 이후 고구려에 대해 수세적이었던 입장에서 벗어나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무령왕 즉위년에 달솔 優永이 거느린 5천의 백제군이 고구려의 水谷城을 선제 공격하였으며, 이듬해에도 다시 고구려의 변경을 공략하였다. 백제의 이러한 자세 변화는 백가의 난을 평정한 이후 전쟁을 통해 귀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처로 여겨진다.275)의자왕이 즉위 초의 정변을 수습한 후 귀족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은 사례가 이에 해당된다.

 백제의 공세에 대해 고구려는 주된 공격의 목표를 바꿔 백제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고구려는 부용세력인 말갈까지 동원하여 백제의 동·북쪽 변경지대인 馬首柵과 高木城·橫岳·加弗城·圓山鄕 및 葦川에 침입하여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거의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 백제가 양에 보낸 국서에서 “누차 고구려를 공파하였고 …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주장한 것은276)≪梁書≫권 54, 列傳 48, 百濟.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한 축성이나 설책 등 방어시설을 확충하여277)무령왕대에 쌓은 방어시설로 高木城, 長嶺城, 雙峴城 등이 있다.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와 전투에서의 승리는 무령왕 자신의 권위와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양군이 교전을 벌인 지점은 연천(고목성), 북한산(횡악) 등이었는데, 이는 이때에 이르러 백제가 이전에 상실한 한강유역의 일부 지역을 수복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278)≪三國史記≫무령왕조에 여제 양군이 교전한 지점이 한강유역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그 사실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馬首柵(연천부근), 高木城(연천), 橫岳(북한산), 水谷城(신계) 등은 한강유역에 있는 지명들이다. 이를 단지 지명이동설 입장에서 그 실체를 부정하거나(今西龍,≪百濟史硏究≫, 國書刊行會, 1934, 126쪽), 또는 실지회복의 염원에서 사비시대의 백제왕실이 한성시대의 지명을 의도적으로 서술한 데에서 생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李道學, 앞의 글, 1984, 25쪽), 보다 신중한 검토를 요한다. 한성이 함락당한 후 문주가 원병을 거느리고 한성으로 향할 때 이미 고구려군은 퇴각한 상태였다는 점, 전술적으로 경기병을 동원해 한강유역에서 단기전을 치를 수 있다는 점, 말갈과 관련된 한성의 동북지역으로서 동성왕대부터 한강유역의 재진출이 시도되었다는 점(兪元載,<武寧王代의 對外關係>,≪百濟 武寧王陵≫, 公州大 百濟文化硏究所, 1991, 54∼55쪽),≪梁書≫百濟傳에 “고구려를 공파하여…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공언한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동성·무령왕대에 한강유역에 재진출을 시도해 일부 영토를 수복하였을 개연성은 높다. 고구려의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형태와≪三國史記≫地理志에 대한 보다 세밀한 검토가 요망된다. 그런데 백제와 고구려 양군이 교전할 때 신라의 지원이 없었던 점이 주목된다. 나제동맹에 따라 신라와 백제 양국 중 어느 일방이 공격을 받아 불리한 전황이 생길 경우 다른 한쪽이 군사력을 지원하는 것이 동성왕대까지의 관례였다. 기존의 나제동맹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신라는 지증왕이 즉위한 후 적대적이던 고구려와의 관계를 개선해 나가면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는 백제와 고구려와의 대결구도에도 직접 개입을 자제한 채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여러 제도를 정비해 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279)梁起錫, 앞의 책(1994) 참조.

 한편 무령왕은 적극적으로 가야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갔다. 가야지역은 근초고왕의 남부지역에 대한 정벌 이래 백제와 부용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남천 이후 백제의 정정불안으로 백제세력권에서 점차 이탈하는 현상을 보였다. 가야왕 荷知가 남제로부터「輔國將軍 本國王」으로 책봉을 받은 사례가(479)280)≪南齊書≫권 58, 列傳 39, 東南夷, 加羅國 建元 원년. 참고된다. 그러나 고구려에 의해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웅진천도 이후 이에 대체할 만한 새로운 농업생산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백제는 왕권이 안정된 무령왕대부터 적극적인 남방의 경영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일본서기≫계체천황 6년(512)과 7년(513)의 기사가 참고된다. 무령왕 12년(512)에 백제가 왜로부터 上哆唎·下哆唎·娑陀·牟婁의 4현을 할양받았으며, 이듬해에는 己汶(남원·임실)·帶沙(하동)지역을 사여받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기사들은 다소 윤색이나 과장된 면은 있으나, 대체적으로 백제가 무령왕대에 남원·임실에서부터 하동에 이르는 섬진강유역 일대를 지배하고 귀속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281)延敏洙,<六世紀前半 加耶諸國을 둘러싼 百濟·新羅의 動向>(≪新羅文化≫7,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1990), 119쪽. 무령왕대의 사실을 전하고 있는≪梁職貢圖≫의 百濟國使條에는 백제의 부용국으로 “叛波·卓·多羅·斯羅·止迷·麻連·上己文·下枕羅”를 열기하고 있는데,282)여기에 보이는 소국은 叛波가 고령의 대가야, 卓은 창원, 多羅는 합천, 前羅는 함안, 止迷와 麻連은 불명, 上己文은 임실·남원, 斯羅는 신라, 下枕羅는 제주도에 각각 비정되고 있으나(延敏洙, 위의 글, 113쪽 및 金泰植, 앞의 글 참조), 많은 이견이 있다. 신라(斯羅) 등을 제외한 가야제국이 백제의 세력권 아래 놓여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중관계는 앞에서 이미 살폈듯이 천도 직후 백제는 고구려의 항로 차단으로 인해 중국과의 교류가 거의 끊어지게 되었다. 문주왕 2년과 동성왕 6년에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동성왕대부터 남제와 활발한 교섭을 전개하였는데, 의례적인 교섭 이외에 책봉이나 관작 청구 등을 주된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무령왕대에 들어와서는 남제의 뒤를 이은 양과 교류하였다. 무령왕 12년에 양과 처음으로 교류한 이래 동왕 21년 11월에 다시 양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 때 보낸 국서에서 백제가 천도 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고구려를 누차 공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283)≪梁書≫권 54, 列傳 48, 百濟. 이에 대해 양은 12월에 무령왕을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으로 책봉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무령왕릉 지석>에서도 확인된다. 백제가 중국왕조로부터 책봉을 통해 국제적인 지위를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권위와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령왕대에 양과의 교섭을 통해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공언한 일이나 영동대장군으로 책봉된 사실은, 백제가 대내적으로 천도 후 정국불안을 극복하여 왕권안정을 되찾았고, 대외적으로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났음을 천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梁起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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