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구조
  • 2) 조세제도
  • (1) 세제의 내용
  • 가. 조와 조

가. 조와 조

 백제의 세제 중에서 租와 調는 서로 결합된 형태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즉 고이왕 15년(248)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1년의 조와 조를 면제한 사례650)≪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15년.에서 볼 때 전세미 수취인 租는 공물수취인 調와 함께 부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먼저 租의 수취대상은 주로 농민층이었다. 백제 초기의 권농기사와 진휼기사 가운데 국가의 보호대상이었던「部民」또는 집단예민은 바로 농업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일반 백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부민」은 공동체 단계의 유제에 따라 연맹단계에서도 각 소국의 수장층과 호민층의 지배를 받는 한편 국가에 대해서도 部를 통해 중층적으로 지배를 받는 존재였다. 아마도「부민」은 단위 정치체별로 파악되어, 인두수에 따라 조와 조 및 역역이 매겨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부민」은 下戶의 존재로 상정될 수 있는데, 이들은 족장적 전통을 갖고 있는 大加·豪民 등에 의해 쌀과 양식, 생선과 소금 등을 가혹하게 수취당하였다. 그러나 통치체제가 갖추어지고 농업생산력이 발전하게 되는 4세기 후반 이후 민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변화되어 갔다. 민은 율령에 의해 지배받는 국가의 공민으로 편입되면서 종래의 임의적이고 가혹했던 소국 수장층들의 사적 수탈로부터 보호받는 존재로 변모하였다. 민 가운데에는 토지 사유화와 농업생산력의 진전에 따라 婢子를 거느린 도미와 같은 편호소민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소농 중심의 농업경영 방식으로 전환됨에 따라 개별가호가 부세를 부과하는 기초단위로 자리잡게 되었다.

 租의 품목은 주로 보리·콩 등 밭작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세기 초 다루왕 때의 東部의 屹于가 말갈과 싸운 공로로 말 10필과 租 5백 석을 상으로 받았는데,651)≪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다루왕 3년 10월. 이 때는 稻田이 아직 국가적인 차원에서 개발되지 않았고,652)≪三國史記≫에는 백제의 稻田개발을 다루왕 6년(33) 2월로 기록하고 있다. 또 건국 초기부터 밭작물인 보리와 콩에 관한 기사가 많이 나오고 있는 데서653)≪三國史記≫百濟本紀에 따르면, 보리농사에 관한 기사는 온조왕 28년 4월, 기루왕 14년 3월, 고이왕 13년, 동성왕 23년 3월로 모두 4회가 보이고, 콩에 관한 것은 기루왕 23년 8월로 1회만 보이고 있다.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이왕 때에 南澤에서 도전을 개발하였다는 것이나654)≪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9년 2월. 제방의 축조와 정비에655)≪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구수왕 9년 2월 및 권 2, 新羅本紀 2, 흘해이사금 21년의 碧骨池 축조사실을 백제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 조의 품목은 콩·보리에서 점차 쌀로 바뀌어져 갔던 것으로 보인다. 즉 쌀은 수리관개시설이 확보된 조건에서 안정적인 생산을 기할 수 있고, 또 다른 작물에 비해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서656)벼의 저장기간은 9년이고, 쌀은 3∼5년, 기장은 3년 정도라고 한다(Francesca Bray,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London, 1984, p.378). 창고의 저장물이나 군량미의 대상물이 되었다. 6세기 무렵 백제의 주요한 수취품목이 調의 경우 布·絹과 직물의 원료인 絲와 麻였고, 租는 쌀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쌀이 비록 주요한 수취품목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보리·콩·조 등의 밭작물은 여전히 수취품목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소산성 안의 군창터에서 탄화된 상태로 稻·小麥·大豆·小豆·粟·蕎麥 등이 발견된 데에서657)鑄方貞亮,<三國史記にあらわれた麥と麥作について>(≪朝鮮學報≫48, 1968), 55쪽. 이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의 租와 調의 수취에 대해서는≪주서≫백제전에 잘 나타나 있다.≪주서≫백제전은 6세기 무렵 백제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의 부세는 그 해의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어 조와 조가 결합된 현물의 형토로 수취되었다.658)이러한 年等 구분에 의한 수취는 조선 전기의 수취기준인 年分九等法의 연원이 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기흥,≪삼국·통일신라세제의 연구≫, 역사비평사, 1991, 75쪽). 그러나 그 수취기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6∼7세기 무렵 고구려에 있어서 稅의 경우 인두를 기준으로, 租는 재산의 크기를 기준으로 호를 3등급으로 구분하여 차등 수취하였으며, 調의 수취량은 곡물인 경우 5석이었는데, 戶租의 수취량보다 훨씬 과중한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수취기준도 고구려와 같이 인두수에 의해 매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조와 조의 수취기준은 역역의 편성과 마찬가지로 人丁數를 기준으로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丁男에게는 곡식과 역역을, 丁女에게는 포·견·사 등이 부과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작성된 촌락문서에도 호등제의 편성기준이 주로 인정이었던 사실이 참고된다. 이는 휴경이나 휴한농법의 제약으로 陳田이 증가하고 농업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낮으며, 양전사업과 토지면적에 따른 役價산정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국가에서는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하기 보다는 인정을 기준으로 수취하는 쪽을 선호하였을 것이다. 토목공사에 15세 이상의 정남을 징발했다는 기사나659)≪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책계왕 즉위년. 사비시대 초에 설치한 22부사 중에서 호적작성의 업무를 가진 點口部의 존재를 통해 백제는 국초부터 호구를 항례적으로 파악하였음을 짐작할 수 잇다. 다만 백제 초기에는 수장층과 호민층이 부·부내부·구소국 등 단위 정치체별로 호구를 파악하였을 것이나, 통치조직이 정비되어감에 따라 점차 연령급별 인구파악을 전제로 하는 호구령을 율령에 포함하였을 것이고, 도미전에서 편호소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듯이 5세기 후반에는 인정을 편호하여 수취의 기준을 삼음으로써 인두세를 부과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와 조의 수취방식은, 국초에는 하호에 비견되는「부민」또는 집단예민의 인두수를 기준으로 부·부내부·구소국 등 단위 정치체별로 취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에는 아직 중앙지배력의 한계로 인해 종래 공동체의 유제하에서 중층적으로 편제되어 있는 부·부내부·구소국 등 단위 정치체를 통해 운영하는 것이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부민」또는 집단예민들은 국가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단위 정치체의 조직과 지배자를 위해 세를 부담하였고, 그 부담은 매우 과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지방 통치조직을 담로라 불리우는 군 단위까지 정비하면서660)檐魯는 지방지배의 거점으로서 성·읍을 의미하는 동시에 일정한 통치 구역을 의미하기도 한다(盧重國,≪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1988, 241쪽). 調의 수취 기준을 새로이 마련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 때에 이르러 國郡의 경계를 처음으로 정하고 향토의 所出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고 하는 바,661)≪日本書紀≫권 11, 麟德天皇 41년 3월. 이를 계기로 하여 중앙정부에서는 각 지방이 소출하는 특산물을 일률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각 지역의 실정과 담세능력을 고려하여 調를 부과하려고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지방관을 파견함으로써 민에 대한 국가의 지배가 보다 강화되었음을 의미하지만, 이에 따라 종래 단위 정치체별로 임의적으로 가혹하게 행해진 집단적 수취가 극복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세제상의 발전은 큰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사회발전에 따라 개별 가호가 부세 수취의 기본단위로 자리잡는 추세 속에서 국가의 수취는 지방관에 의해 행정 단위별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아울러 개별 가호에 대한 정률적인 조세 부담액의 수취가 가능하게 되었다.662)김기흥, 앞의 책, 74쪽.

 한편 백제가 세제를 획기적으로 정비하고 확립하게 된 것은 6세기 중반의 성왕 때부터였다. 사비로의 천도와 더불어 중앙에 5좌평 16관등제와 국왕직속의 행정부서인 22부제 및 지방의 방·군·성체제 등 일련의 중앙집권화 시책이663)梁起錫,<百濟 聖王代의 政治改革과 그 性格>(≪韓國古代史硏究≫4, 1991), 75∼103쪽. 추진되면서 세제도 체계적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수취기반을 확대하여 왕정의 물질적 기반을 공고히 하면서 국왕 중심의 정치운영을 위해 취해진 조치로 이해된다. 성왕대에 설치한 22부 중에서 내관의 穀部와 內·外椋部 및 외관의 點口部와 綢部의 존재가 바로 수취체제의 개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이었다. 곡부 이외의 내·외경부는 어공물이나 祭具 및 국가 재용에 관한 의료나 식물을 저장·보관하는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조직의 개편에서 특히 재정기구의 분화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서 국가발전에 따른 재정수입과 지출의 업무가 점차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재정기구의 설치는 신라의 調府·倉部 설치에 비견될 만한 것이며 백제는 이로부터 전국적인 규모의 세제를 확립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재정기구의 책임자는 長史·長吏 또는 將長·宰官長으로 불리웠는데, 임기는 3년이었다.664)≪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百濟.
≪翰苑≫蕃夷部, 百濟.

 이와 같이 백제의 租와 調는 종래 중층적으로 편제되어 있던 단위 정치체를 단위로 하여 인두수를 수취기준으로 부과된 복속 의례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그러나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와 6세기 성왕대를 거쳐 지방 통치조직이 정비되면서 지방관에 의해 수취되는 전국적인 규모의 세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세제와 관련된 재정기구의 설치·운영, 임기 3년인 세무담당관리의 임명, 인정의 항례적 파악 등의 조치가 취해지면서 개별 가호가 수취의 기본단위로 자리잡게 되었고, 戶租 수취에는 풍흉에 따른 호등제를 채용함으로써 과세의 형평성을 기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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