力役은 국가나 지방관청에 동원되어 무상으로 노역하는 요역과 군역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는데 租와 調에 못지않은 힘든 부담이었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성곽·궁실·제단·사대·고분·다리·제언의 축조 등에 역역을 동원한 기사를 보여준다.665)≪三國史記≫百濟本紀에 보이는 역역동원 사례는 총 69건으로서, 그 가운데 設柵이나 축성이 45건을 차지하고 있어서 당시에 정복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궁실조영인데, 그 부속건물로 동명묘·시조묘·대단·사대·임류각 등을 짓고 이에 따른 조경에도 막대한 인력을 투입하기도 하였다(≪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35년 3월). 그 밖에 도시와 관련된 시설, 농업생산력 증진과 관련있는 제방축조와 정비 등이 간헐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치수와 대토목공사에는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는데, 김제의 벽골제 축조공사에는 연인원 32만여 명이 동원되었고(尹武炳,<金堤 碧骨堤 發掘報告>,≪百濟硏究≫7, 1976, 77쪽),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과 같은 대형 옹관묘의 봉토를 축조하는 데에는 100여 명의 인원을 24일 동안 동원해야 가능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成洛俊,<榮山江流域의 甕棺墓硏究>,≪百濟文化≫15, 1983, 48쪽). 대규모의 역사는 권력집중의 한 수단으로 전제군주에 의해 이용되기 마련이듯이,666)“君者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三國史記≫권 49, 列傳 9, 倉助利). Karl A. Wittfogel, Oriental Despotism, Yale University Press, 1957, pp.30∼41. 이들 각종 역사는 왕권강화 시책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었다.
역역은 대부분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부 단위나 또는 국가 규모의 중앙역역 형태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초기의 역역 징발대상은 주로 하호로 표현되는 일반민이었다. 책계왕 원년(286)의 위례성 수리공사를 위해 丁夫를 동원한 사례와 전지왕 13년(417)에 沙口城을 쌓을 때 15세 이상의 동부와 북부인들을 동원한 예를667)≪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전지왕 13년 7월. 볼 때 원칙적으로 15세 이상의 정남을 부 단위로 징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남의 연령 상한은 통일신라시대의 촌락문서로써 미루어 볼 때 60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정남에 대한 역역의 동원은, 규모에 따라 구소국의 읍락이나 부 단위로 일정지역의 정남 대상자를 모두 징발하여 일정한 공역기간도 없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668)김기흥, 앞의 책, 91쪽. 따라서 국가로서는 人戶에 대한 역역지배를 위하여 정례적으로 연령급별 호구파악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근초고왕 때에 반포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율령에는669)盧重國, 앞의 책, 267쪽. 아마도 호구령과 부역령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역의 동원은 주로 2월과 7월의 농한기를 이용하였는데, 이는 농업을 중시하는 국가의 정책을 반영하는 것으로써, “농사의 시기를 잃지 않도록 불요불급한 일을 중지하라”670)≪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38년 3월.는 조치는 바로 그러한 국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한편 국초의 군역 대상자는 諸加·豪民層을 포함한 지배층이었다. 그들은 집집마다 병기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전시에는 전사집단으로 출정하였다. 국초부터 진씨세력이 좌장을 통해 병권을 장악했던 사실은671)金翰奎,<南北朝時代의 中國的 世界秩序와 古代韓國의 幕府制>(≪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歷史學會, 1985), 163쪽. 그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에 생산자였던 하호들은 이들 지배층에게 식량과 물자를 조달해 주는 역할만을 하였다. 이는 하호들이 군역에서 제외된 계층으로서 역역부담만을 맡았던 사실을 반영하며, 역역에 있어서 당시에는 군역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672)김기흥, 앞의 책, 81쪽.
그러나 6세기 무렵에 이르러 역역과 군역의 징발기준이 바뀌었을 듯하다. 즉 무령왕 23년(523)의 雙峴城 축조 사례에서673)≪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무령왕 23년 2월. 역역동원이 종래의 부 또는 구소국의 읍락 단위에서 주·군의 행정구역 단위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의 사례이긴 하지만 소지마립간 8년(486) 三年山城과 屈山城의 축조에 一善 변경지역의 丁夫 3천 명을 동원한 사례에서,674)≪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소지마립간 8년 정월. 이제 소요 노동력과 공사기간을 예측하여 역역을 동원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때에 이르러서는 해당지역의 정남을 무차별 동원하는 것보다 일정한 비율로 호당 정남의 수를 징발하여 역역부과의 형평성과 합리성을 고려하거나 또는 호세의 호등제를 적용하는 방식과 같이 일정한 인원을 징발하는 원칙을 강구해 나갔을 것이 상정된다.675)김기흥, 앞의 책, 92∼95쪽. 군역의 경우도 사료가 없어 그 실체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으나,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신라와의 전쟁이 지속되고 격하되면서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게 되었고, 또한 일반민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어 가는 추세로 말미암아, 일반 백성들도 점차 군역에 징발되었던 것이다. 신라 중고기에 일반 지방민을 州兵으로 동원한 사례나,676)李文基,<新羅 軍事組織 硏究의 成果와 課題>(≪歷史敎育論集≫12, 1988), 166쪽. 건장한 사람을 선발하여 군대에 편성하였다는≪隋書≫新羅傳의 기사 등으로 미루어 보아, 백제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한편 6세기 중반 성왕대에 빈번한 역역징발 업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관청이 설치·운영되었다. 22부사 가운데 외관 소속의 司空部가 바로 그것인데, 이의 설치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역역행정의 체계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역역은 禪雲山歌에서도 볼 수 있듯이677)≪高麗史≫권 71, 志 25, 樂 2, 三國俗樂 禪雲山. 너무 빈번하고 장기적인 데다가 농번기에도 동원되는 경우가 있어서 농민들의 생계에 큰 피해를 주었다. 무왕대에는 여름철에 궁실을 중수하는 역사를 일으켰다가 한재로 인해 공역을 중단하기도 하였고,678)≪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31년 2월. 개로왕 때처럼 농민들에게 부역을 과중하게 부과함으로써 웅진천도라는 정치적 난국을 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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