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구조
  • 3) 산업
  • (1) 농업생산력의 발전
  • 나. 4∼5세기 농업생산력의 발달

나. 4∼5세기 농업생산력의 발달

 철제 농토목구의 광범위한 보급은 농업생산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철제 농토목구의 사용량이 4∼6세기에 이르면 이전 시기에 비해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옛 백제영역이었던 경기·강원·충청·전라도 지역에서 4∼6세기에 제작된 보습·따비·쇠스랑·낫·살포·자귀·괭이형 도끼·살포형 도끼·일반 도끼류 등의 철제 농토목구가 보고된 바 있다.693)金光彦, 앞의 글, 46쪽에 제시한 1921∼1986년 전반기까지 발굴·보고된 총 123개의 4∼6세기 철제 농기구의 분류·정리 도표 참조. 가장 많이 나오는 철제 농토목구로는 괭이형 도끼와 낫이며, 앞 시기에 보이지 않던 쇠스랑도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철제 낫은 전국적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고 있지만, 괭이형 도끼나 살포날·쇠스랑 등은 남한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이 4세기 이후 철제 농토목구는 백제 초기에 비해 양적으로 많아지고 종류도 다양해지며, 또 철기의 제작기술에서도 용도에 맞게 주조와 단조의 방법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철기의 수명을 보장하는 기술이 응용되기도 하였다.694)전덕재, 앞의 글, 18쪽.

 괭이형 도끼 또는 주조 철부는 종래의 목제 괭이를 철제로 전환시켜 폭이 좁은 형태로 발전시킨 경작용 농구로서 주로 경상도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695)金光彦, 앞의 글, 67쪽. 이는 흙덩이를 부수어 고르거나 파종할 도랑을 만들고 제초작업을 할 때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밭농사에 있어서 작업효율을 높이고 노동력을 절감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였다. 백제지역에서는 원삼국기의 유적인 양평 대심리 A지역에서 출토된 바 있으며, 4세기 이후의 것으로는 해남 月松里 고분과 청주 新鳳洞 토광묘군에서 각각 출토되었다.

 철제 낫은 철기시대의 철도자를 대신하여 논·밭농사에 널리 사용되던 수확 기구이다. 낫은 4세기 이후 날모양과 각도가 다양해지는데, 수확할 때에 그루터기를 뿌리째 베어낼 수 있어 작업효율을 크게 향상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절감시킬 수 있었다. 이는 남원 月山里 고분, 청주 신봉동 토광묘군, 임실 金城里 석곽묘, 서울 九宜洞에서 각각 출토된 바 있다.

 말굽형 따비날과 철제 가래날은 목제 따비나 가래의 날끌을 U자형 철판으로 보강한 갈이기구로서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협력하여 땅이나 도랑을 파거나, 제방을 쌓거나, 또는 논농사의 농구로 사용된다. 백제지역에서는 충북 중원 하천리 주거지에서 원삼국기의 것이 출토된 바 있으며, 4세기 이후의 것으로는 서울 石村洞 3호분 동쪽 고분군과 구의동, 해남 월송리 造山古墳, 남원 細田里 등에서 각각 출토되었다.

 쇠스랑은 퇴비를 쌓아 올리거나 갈이와 김매기에 효과적으로 사용하던 경작용 농구로서 4세기 이후 백제나 신라지역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696)金光彦, 위의 글, 56쪽. 백제지역에서는 서울 구의동과 서산 明智里의 토광묘에서 각각 출토되었다. 서산 명지리의 것은 일본 大阪府 紫金山 고분 출토품과 같은 계통인 것으로 밝혀져 따비를 비롯한 농토목 용구들이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697)李殷昌,<農工具>(≪韓國考古學≫, 河西書房新社, 1972), 220쪽.

 보습 또는 쇠삽날은 삽형으로 목재를 홈에 맞춰 끼우고 밭을 가는 데 사용하는 쟁기보습을 말한다. 다소 기년상의 문제는 있지만, 신라에서는 1세기경 노례왕 때에 처음 사용하였다고 전하는데698)≪三國遺事≫권 1, 紀異 2, 第三 弩禮王. 우경의 실시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백제지역에서는 원삼국기의 것으로 경기도 가평 이곡리에서 보습틀이 나온 것이 있으나, 4세기 이후의 것으로는 서산 명지리 4호 토광묘와 서울 구의동에서 길이 44.4cm, 너비 34.4cm나 되는 대형 보습을 포함하여 3점이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크기의 보습은 사람이 끄는 쟁기보다는 축력을 이용하여 경작하는 데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자료의 출토량이 적은 것으로 보아 아직은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축력을 이용한 우경을 실시한 경우 깊이갈이가 가능해져 종전보다 2.4배 정도의 노동생산력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699)木村正雄,≪中國古代農民叛亂の硏究≫(東京大出版會, 1979), 54쪽.
우경을 행할 경우 따비로 밭을 갈 때보다 약 17배 정도의 경작능력이 향상된다는 연구도 참고된다(中國農業科學院·南京農學院中國農業遺産硏究室 編,≪中國農學史≫上, 科學出版社, 1984, 153쪽).
토질의 개선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우경의 보급은700)신라는 지증왕 3년(602)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牛耕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고 한다(李春寧,≪李朝農業技術史≫, 韓國硏究院, 1964, 17쪽;전덕재, 앞의 글, 25쪽;安秉佑, 앞의 글, 278쪽). 작업 효율을 크게 높이고 아울러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켜서 나아가 1인당 경작면적을 늘릴 수 있었으며, 개별 가호 단위의 농업경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701)中國農業科學院·南京農學院中國農業遺産硏究室 編, 앞의 책 참조.
전덕재, 위의 글, 27쪽.

 한편 4세기 이후 철기제작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단조제의 도끼류·괭이·자귀·쇠삽날·톱 등 농경이나 개간에 필요한 용구도 생산되었다. 서울 구의동 출토의 도끼류, 임실 금성리 석곽묘 출토의 자귀, 나주 新村里 9호분 출토의 톱, 청주 신봉동 토광묘군 출토의 끌과 주조·단조로 된 도끼류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농토목 용구가 보급됨에 따라 수리관개시설의 축조와 정비가 용이해지고 수전개발이 더욱 활발해지게 되었다.

 수리관개사업은 위의 철제 농토목 용구의 생산 이외에 고도의 토목기술 및 조직적으로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체계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고대국가에서는 국가권력이 관여하기 마련이었다. 비류왕 27년(330)에 축조되었다는 金堤의 碧骨堤는 발굴조사 결과 제방의 길이가 약 3km, 높이가 약 4.3m, 상변폭 7.5m, 하변 폭 17.5m의 규모였음이 밝혀졌는데, 이 축제공사에 연인원 322,500명 이상의 대규모의 노동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한다.702)尹武炳, 앞의 글, 77∼78쪽. 또한 무령왕 때에도 제방을 축조하고 유이민을 귀농시키는 일련의 조치가 있었는데,703)≪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무령왕 10년 정월. 이로써 농업인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국가적인 노력의 일단을 짐작 할 수 있다. 특히 제방을 쌓는 데는 고도의 토목기술을 필요로 하는 바, 서울 석촌동에 있는 4세기 무렵의 기단식 적석총의 존재를 미루어 볼 때, 백제는 4세기 무렵에 이미 고도의 토목 및 측량기술을 습득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수리관개시설의 축조와 정비는 수전의 개발이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마련이다. 제방을 축조함으로써 주변의 수전을 개발하고, 또한 가뭄과 홍수로부터 안전하게 전답을 유지할 수 있어서 수확량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6세기 무렵 신라에서는 수리관개시설을 전제로 하여 논이나 밭농사를 겸할 수 있는「水陸兼種法」을 개발하여704)≪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新羅.
이 기사를 단순히 ‘논과 밭이 있다’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창령 진흥왕 순수비에「白田」이란 말이 陸稻의 의미를 갖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보면(諸橋轍次,≪大漢和辭典≫권 8, 27쪽), 6세기 당시 신라에서는 水稻와 陸稻의 구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토지 이용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수전의 확대로 常耕田이 증가하는 추세 속에서 주곡이 콩·보리에서 점차 쌀로 바뀌어 갔다. 백제의 경우 수전의 개발이나 농법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6세기 무렵 백제에서 곡물 가운데 수세의 대상물은 쌀이었다는 점이 참고된다. 또한 5세기 무렵 일본의 河內지방을 개척한 백제계 이주민들이 間斷灌漑法과 습전을 건전으로 만드는 방식 등으로써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켰다는 데에서 이러한 방식을 백제에서 이용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을 듯하다.

 간단관개법은 물을 넣고 빼는 방법으로 물로 김을 매는 농법으로서, 벼 뿌 리에 산소를 공급해 주어 벼의 생육을 도와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이다. 이러한 농법은 5세기 무렵 일본의 하내지방으로 이주한 백제인들에 의해 채 용되어 당시 일본 농업생산력을 크게 증진시키는 데 기여한 바 있다.705)飯沼二郞,<五世紀における農業革命>(≪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20, 1973), 59쪽. 또한 이들 백제 이주민들은 하내지방의 상습전을 건전으로 만든 결과 농업생산력을 단위 면적당 종전보다 3배나 증산시켜「농업혁명」을 이룬 바 있다.706)李進熙,<古代 朝日關係史硏究와 武寧王陵>(≪百濟硏究≫特輯號, 1982), 64∼69쪽.
森浩一,<日本內의 渡來集團과 그 古墳>(≪百濟硏究≫特輯號, 1982), 111∼114쪽.
飯沼二郞, 위의 글, 58∼59쪽.
항상 지하수위가 높고 클레이층이 바로 층하에 형성되어 배수가 불량한 저습지는 토양의 영양도도 낮고 수확량도 적기 때문에 이러한 지하수형 습전을 건전으로 만들어야 농업생산량의 증대를 기할 수 있게 된다.707)八賀晉,<古代における水田開發>(≪日本史硏究≫96, 1966), 4쪽.
―――,<古代の農耕と土壤>(≪古代の日本≫2, 1972), 25∼27쪽.
1세기 무렵「澤」에 稻田을 개발했다는≪삼국사기≫의 기사는 이와 관련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습전의 건전화 사업에는 단조철로 된 농토목 용구의 생산과 고도의 토목·측량기술의 습득 및 노동력의 조직적인 동원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6세기 무렵 백제에는 아직 시비법이 도입되지 못하여 연작이 어렵고 토지의 생산성은 전반적으로 낮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상경전이 아닌 경우 지력을 회복하기 위해 일정한 기간 동안 땅을 묵히는 휴경농법과 1∼2년을 휴한하는 농법이 불가피하였다. 경기도 하남 渼沙里에서 발굴조사된 4∼6세기 무렵 백제의 밭 유적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유적은 세 문화층으로 되어 있는데, 하층은 4∼5세기 무렵의 유적이고 상층은 5∼6세기 무렵의 것으로 보고되었다. 하층의 밭이 폐기된 후 그 위에 다시 수혈 주거지가 한 번 조성되었다가 폐기되고 나서 다시 상층의 밭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708)서울大博物館,≪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 渼沙里≫제4권(渼沙里先史遺蹟發掘調査團, 1994), 208∼214·258∼259쪽. 밭이 한동안 폐전이 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4∼6세기 무렵 밭농사가 휴경 또는 휴한법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토지의 생산성이 낮았던 요인 가운데에는 잇따른 기근·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및 역질, 계속되는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은 농업노동력을 감소시키기 마련이어서, 결국 수리관개시설에 대한 정비 및 농업재생산 기반을 약화시키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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