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구조
  • 3) 산업
  • (2) 수공업의 발달
  • 나. 민간수공업의 성장

나. 민간수공업의 성장

 당시 농업이 주된 산업이고 자연경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공업은 농업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부수적으로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원료를 마련하여 직물류나 생활용구 등을 생산하였다. 특히 직물류는 농민들의 기본적인 옷감으로서 광범위한 수요에 기초했을 뿐 아니라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공물의 대상품목이었는데, 그 대부분은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되었다. 마한에서는 농상을 장려하여 면포를 생산하였고, 6세기 무렵에는 布·絹과 함께 직물의 원료인 絲·麻를 공물로 징수하였다. 이 직물류의 생산은「男耕女織」이란 말이 있듯이725)≪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 여자들에 의한 집단사역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신라의 경우 8월 한가위에 벌어지는 길쌈놀이와,726)≪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유리이사금 9년. 阿達城에서 마를 심는 작업이 요역의 형태로 공동으로 행해진 사례727)≪三國史記≫권 47, 列傳 7, 素那.가 참고된다.

 이와 같이 민간수공업 부문 가운데서 가내수공업이 기본적인 생산형태이었고, 점차 6∼7세기 무렵에 이르러 농업에서 수공업이 분리되면서 수공업을 전업으로 하는 전업수공업자도 생겨났다. 7세기 후반 신라의 廣德이란 승려가 경주 분황사 근처에서 은거하면서 신발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는 사례가728)≪三國遺事≫권 5, 感通 7, 廣德 嚴莊. 참고된다. 광덕이 신발과 같은 대중적인 수요품을 만들어 팔았다는 것은 당시 자가수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환과 매매를 위한 생산을 전업적으로 행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729)홍희유, 앞의 책, 16쪽. 이는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시장의 발달, 대외관계의 진전 등과 무관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백제 수공업 발전의 두드러진 부문인 관영수공업도 바로 민간수공업의 원료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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