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구조
  • 3) 산업
  • (2) 수공업의 발달
  • 다. 각종 수공업기술의 발전

다. 각종 수공업기술의 발전

가) 금속가공 수공업의 발전

 백제는 금·은·청동·철 등의 금속을 소재로 한 가공기술을 발전시켜 무기나 생산용구를 비롯하여 지배층의 위신과 사치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치품과 일반 사람들이 쓸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여러 제품을 만들었다. 금속 가공업 가운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철가공업이었다.

 철기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주철과 단조철의 두 가지 기술에 의해 많은 철제 용구들이 다량으로 생산되었다. 백제는 야철된 철 소재를 1차로 가공하여 鐵鋌을 만든 다음 용도에 따라 다양한 철제품을 만들어 썼다. 백제지역에서는 철정이 별로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서산 명지리 토광묘에서 출토된 철정과 근초고왕 때에 왜에 철정을 보내준 사례 등이 참고된다.

 백제의 철기는 무기류와 마구류 및 농공 토목용구가 대부분인데, 공격용 무기로는 환두도·쇠살촉·투겁창·가지창 등이 있으며, 방어용 무기로는 갑옷과 투구가 있다.730)金基雄,<武器와 馬具>(≪韓國史論≫15, 國史編纂委員會, 1985), 145∼152쪽. 환두도 중에서 무령왕릉과 나주 신촌리 9호분 乙棺에서 출토된 單龍 환두대도가 유명하다. 무령왕릉의 것은 칼자루 끝의 고리 안에 여의주를 입이 물고 있는 용머리를 장식하였으며, 칼자루의 손잡이에는 금줄을 감고 그 양쪽에는 龜甲 봉황문을 돋운 금구를 끼웠다. 갑옷으로는 청주 신봉동 토광묘에서 출토된 삼각판 釘結板甲이 대표적이다. 특히 백제는 중국에 明光鎧·칠갑·彫斧 등의 무기류를 보냈는데, 그 가운데 명광개는 갑옷에다 황색칠을 한 백제의 특산품이었다.731)洪思俊,<文獻에 나타난 百濟産業>(≪百濟硏究≫3, 1972), 49∼50쪽. 농공 토목용구로서는 도끼·끌·낫·쇠스랑 등이 있는데, 도끼의 경우 주조보다도 단조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일본에 있는 칠지도는 4세기 후반 백제가 100번 담금질하여 단조한 百鍊鋼의 철로 제작된 것으로서 당시 백제의 제철기술의 수준을 보여준다. 서울 구의동 유적에서 출토된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 무렵의 철부는 탄소 함유량이 0.86%에 달해 현재의 工具鋼 수준과 견줄 만한 高炭鋼을, 철촉은 함유량 0.51%에 달하는 中炭鋼을 각각 소재로 하여 계속하여 반복 鍛打하는 방법으로 만든 것이다.732)尹東錫·李南珪,<韓國 古代 鐵器의 CMA와 EPMA에 의한 硏究>(≪韓國考古學報≫17·18, 1985), 95∼100쪽.

 한편 철기의 주조·단조기술의 발전과 함께 展延性이나 가열 용해성을 이용한 금·은 등 금속공예 기술도 발달하였다.733)朴南守, 앞의 책, 37∼38쪽. 장신구류·생활용품·불구류·장신구 등의 부문에서 백제의 세련된 금속가공 기술의 수준을 살펴볼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제관식·귀걸이·팔찌·반지·은제 잔과 잔탁 등이 웅진시대 금속공예의 기술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인데, 화려하고도 세련된 조형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백제의 관모와 관식으로는 무령왕릉에서 왕과 왕비의 것이 각각 1쌍씩 나왔으며, 나주 신촌리 9호분과 익산의 笠店里에서 출토된 금동제 冠帽 등이 있다. 그 밖에 불교문화와 관련하여 뛰어난 금속공예품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부여 錦城山 폐사지 출토의 청동탑편, 부여 西腹寺址 출토의 청동 육각잔, 금동제 허리띠 장식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부여 陵山里 건물터에서 발굴된 금동용봉무늬 향로는 백제의 금속공예의 기술수준을 보여주는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러한 금속공예품을 만드는 데에는 打出法·押出法·鏤金세공기술·상감기술·아말감에 의한 도금법 등의 금속공예 기술이 적용되어 백제 금속공예의 기술이 높은 수준임을 보여주고 있다.734)朴南守, 위의 책, 38∼39쪽.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제 뒤꽂이는 금속판을 안팎에서 鎚로 쳐서 무늬나 浮彫를 나타내는 기술인 타출법으로 제작된 것이라 한다.

나) 직조수공업의 발달

 백제의 수공업 가운데에서 금속가공의 수공업 못지 않게 발달한 부문이 직조수공업이다. 마한 때부터 면포 등의 직물수공업이 발달하였고, 국가의 지배체제가 정비된 이후에는 민간 자체의 광범위한 수요와 공물납부의 필요성에서, 그리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사여품이나 사치적 욕구 및 대외교역상의 필요성으로 궁중과 관청에서 관영수공업의 형태로 다양한 종류의 직물을 생산하였다. 백제의 색복제가 紫·緋·靑의 3색으로 구분된 점이나735)≪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27년 2월.≪주서≫백제전에 나오는 지배층의 복식에 관한 기사와 조세기사 등에서 백제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직물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신라처럼 다양하게 생산 공정별 분업형태로 직물을 생산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6세기 무렵 백제의 공물세인 調의 품목이 직물인 絹·布와 그 원료에 해당하는 絲와 麻로 국한되어 있었던 점과 대중국 교역품이 주로 무기류였던 점이 참고된다. 여기에서 견과 사는 마한 이래 백제지역에서 널리 생산되었고, 후대인 15세기에도 마와 함께 桑이 널리 재배되었음이≪世宗實錄地理志≫를 통해 확인된다. 견직물은 제사·직조·염색 등의 생산공정이 소요되는데, 여기에 여러 생산기법이 응용된다.736)직조의 생산공정에 대해서는 朴南守, 앞의 책, 40∼42·69∼74쪽 참조. 사서에 확인되는 견직의 종류만도 錦·綾·羅·紗·絹 등 여러 종류가 보이고 있다. 백제에는 사료가 없어 그 구체적인 실상은 알 수 없지만,≪일본서기≫에는 漢織과 吳織이 백제계 직조공에 의해 생산되었다고 전하는 바,737)≪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14년·15년. 이는 백제의 견직기술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반영한다. 포는 농민들의 직물원료인데, 그 원료에 따라 마포·갈포·저포 등으로 구별된다. 포는 조의 징수 품목이었을 뿐 아니라 7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통화수단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가졌다.738)당시 布 1필의 시가는 조곡 30석 내지 50석이었다고 한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太宗 春秋公). 모시인 苧布도 충남 한산을 비롯하여 부여·청양·서천 등 옛 백제지역에서 생산되었다.<廣開土王陵碑文>에서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에 항복한 대가로 공납했다는 1,000필의 細布는 바로 모시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백제에서는 세포를 만드는 수공업이 크게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는 7세기 무렵에 이미 20升布를 비롯하여 30승포·40승포 등의 섬세한 세포를 생산하기도 하였다.739)朴南守, 앞의 책, 69쪽.

<梁起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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