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측 문헌에「百濟」라는 국명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당나라 초기 房玄齡 등이 편찬한 서진 및 동진대의 사서≪晋書≫載記 慕容皝(337∼348)조의 중국과의 교류기사이다.775)≪晋書≫권 109, 載記 9, 慕容皝. 그러나 자세한 내용은 남조 (劉)宋대의≪宋書≫에서부터 보인다. 즉≪송서≫백제전에 의하면 元嘉 27년(450) 비유왕이 송 문제에게 청하여 한나라 焦贛이 찬술한 易書인≪易林≫과 式占(唐六典에 式盤으로 占을 쳤다고 함;<사진 1>참조) 등을 얻었다.776)≪宋書≫권 97, 列傳 57, 東夷, 百濟國. 역시≪양서≫백제전에 의하면 사비성에 남천하기 전후인 中大通 6년(534)과 大同 7년(541)에 백제의 성왕은 양무제에게 사신을 보내≪涅槃經≫등의 해설서와 毛詩博士, 工匠·畵師를 청하여 받았다.777)≪梁書≫권 54, 列傳 48, 諸夷列傳東夷, 百濟 및≪梁書≫권 4, 簡文帝帝紀 太淸 3년 참조.
이러한 학술·불교·역술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주서≫백제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778)≪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즉 고전과 역사(墳史)서를 즐겨 읽고 그 가운데 우수한 자는 훌륭하게 문장을 구사하였다. 또 음양·오행설을 이해했고, 송의 元嘉曆을 채용하여 寅月을 정월로 삼았다. 그리고 의약·卜筮·占相術에도 능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五經·子史 등 고전과 사서에 능하였고, 대쪽과 龜甲으로 점을 치는 중국 옛부터의 풍습도 역시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백제인들은 학술뿐 아니라 관료로서도 맡은 직무를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이른바 能文能吏의 소양도 갖추었던 것 같다. 또한 군왕에게 정사를 간할수 있는 上表·上疏制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당시 귀족관료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층의 학술문화 수준은 매우 뛰어났던 것이다. 더욱이≪양서≫신라전에는 신라인이 중국과 통하려면 백제 사람의 통역이 있어야 된다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779)≪梁書≫권 54, 列傳 48, 諸夷列傳東夷, 新羅. 당시 학술문화 전반에 걸쳐 백제가 신라보다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언어의 경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양서≫백제전에서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고 하였고,≪주서≫백제전에서는 왕족인 부여씨와 민에 속하는 마한인과의 사이에 사용하는 용어의 차이가 인정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백제의 왕족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은 부여에 바탕을 둔 부여어를 사용하고 피지배층인 민은 마한 토착어를 사용하여, 근초고왕이 마한 전역을 통합한 후에도 오랫동안 이러한 언어상의 차이는 존속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양서≫백제전에 “그 언어는 중국의 것을 參用하였다”라고 한 것처럼 백제의 지배층사회에서는 중국측 한자어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이해된다. 가령 백제에서 모자(帽)를 冠, 저고리(襦)를 複衫, 바지(袴)를 褌이라 하는 등 중국 복식사의 의례적인 용어를 수용하고 있다. 반면 신라의 경우에는≪양서≫신라전에서 관을 遺子禮, 저고리를 尉解, 바지를 柯半, 신(靴)을 洗로 각각 표시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관위를 子賁旱支, 齊旱支, 謁旱支 등이라 한 바와 같이, 신라어가 알타이 어군에 속하며 旱·干·飡 등 汗(大)에 통하는 공통의 어간에 바탕을 둔 토착어를 사용한 문제와 관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백제어가 한자문화에서 영향을 많은 받은 것과는 달리 신라는 통일전까지 고유의 토착어를 지켜온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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