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4. 사회 구조
  • 2) 법률과 풍속
  • (2) 풍속
  • 나. 신앙

나. 신앙

 ≪삼국사기≫祭祀志에는 중국의≪冊府元龜≫의 외신부 백제조를 인용하여, 매년 4계절 중 仲月인 2월(仲春)·5월(仲夏)·8월(仲秋)·11월(仲冬)에 왕이 천신과 오행사상에 의한 5帝神을 받들어 제사지내고, 그들 시조인 仇台(優台)의 사당을 도성 안에 세워 역시 1년에 네 차례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780)孔安國의 尙書 序에 “少旱 金天氏(金德王), 顓頊高陽氏(水德王), 帝嚳高辛氏(木德王) 唐堯(火德王) 虞舜(木德王)”이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주서≫백제전에도 전한다.

 또한≪古記≫를 인용하여 온조왕 20년(2) 2월 왕이 제단을 설치하여 천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고, 이어서 같은 왕 38년 10월과 다루왕 2년(29) 2월, 고이왕 5년(238)과 10년·14년 정월, 근초고왕 2년(347) 정월, 아신왕 2년(393) 정월, 전지왕 2년(406) 정월, 모대왕(牟大王=동성왕) 11년(489) 10월에 각각 시조 온조왕 때와 같이 제단을 세워 천지신을 위한 제사를 받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역시 같은≪고기≫의 기사를 옮겨 다루왕 2년 정월과 책계왕 2년(287) 2월, 분서왕 2년(299) 정월, 계왕 2년(345) 4월, 아신왕 2년(393) 정월, 전지왕 2년(406) 정월 동일하게 동명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온조왕 원년 정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운 이후 역대 왕들이 즉위 초에 이 사당을 배알했다고 하는≪삼국사기≫기록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781)≪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원년에 “立東明王廟”라 한 이후 다루왕·구수왕·책계왕·분서왕·아신왕·전지왕조에 동명묘 拜謁기사가 보인다. 그런데 이≪삼국사기≫제사지에 인용한≪고기≫란 이미 없어져 전하지 않는≪舊三國史記≫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음양오행사상의 영향으로 인정되는 5제숭배 등 중국문화 계통의 영향을 제외하면, 불교가 수용된 침류왕(385) 이전의 한성시대에는 토속신앙의 흐름이 강하게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제천의식은 고조선의 하늘숭배와 동일한 계통의 문화를 계승한 부여·고구려계 시조설화가 결합된 것으로서, 부여의 迎鼓(12월), 동예의 舞天(10월), 고구려의 東盟(10월)과 아울러 삼한의 天君·蘇塗의 존재에서도 역시 동일한 토속적 신앙의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하늘뿐만 아니라 천지산천 등 자연의 여러 신을 숭배해 온 토속신앙은 八關會를 통하여 신라와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맥을 이었다.

 불교에 관하여는, 현재까지 한강변 일원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방에서 호서·호남에 이르는 옛 백제문화 강역으로부터 많은 유적·유물이 발견되어 널리 성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록은 매우 드문 형편이다.≪삼국사기≫에 전하는 사실은 침류왕 즉위년(384) 9월에 동진에서 온 胡僧 摩羅難陀가 불법을 전하고, 그 다음해는 漢山에 절을 창건하여 승려 10인을 두었으며, 성왕 19년(541)에는 중국 남조의 양나라를 통하여≪열반경≫등 경전을 얻었다는 정도이다.782)≪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침류왕 즉위년, 2년 및 권 26, 百濟本紀 4, 성왕 19년.

 그리고≪일본서기≫에는 欽明天皇 13년(552, 성왕 30년)에 西部 姬氏 달솔 怒利斯致契 등이 금동불상 1구와 幡蓋·經論을 각각 약간씩 전하여 일본불교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783)≪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13년 10월조에 보이는데, 帝說·元興寺緣起에는 欽明 7년 무오(538) 즉 성왕 16년 백제가 泗沘로 천도한 해라고 하였다.≪북사≫백제전에는 승려가 있고 사찰과 탑이 많으나 道士가 없다고 한 기사가 있다. 이 내용은 백제의 불교가 크게 발전한 성왕대 이후의 상황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일본서기≫崇峻紀에 의하면 백제는 당시 사원건축가인 사공(寺工)과 노반박사, 와박사(造瓦師) 등을 일본에 보내 고대일본의 불교문화인 飛鳥[아스카]文化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삼국유사≫탑상조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의자왕 3)에 당시 신라에서는 구할 수 없었던 사원건축의 거장 阿非知를 청하여 皇龍寺9層塔을 완성하였다고 한다.784)≪三國遺事≫권 3, 塔像 4, 皇龍寺九層塔.

 백제의 求道僧으로는 三論宗에 정통한 惠現이 있었고,785)≪三國遺事≫권 5, 避隱 8, 惠現求靜. 인도에까지 가서 律部를 익혀 백제 律宗의 비조가 된 謙益과 같은 명승이 있었다.786)李能和,≪朝鮮佛敎通史≫(新文館, 1918).

 고구려와 같이 백제에서도 후기에는 도교가 수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가령 扶餘郡 窺岩面 外里에서 발견된 山水文·山水鳳凰文(<사진 2>)에 이른바 도교세계에서 말하는 三神山(蓬萊·方丈·瀛州山) 및 道觀(道院)과 道士로 추정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또 근래 부여 陵山里에서 발견한 금동향로의 상단 뚜껑쪽에 새겨진 문양은 주제가 신선이 살았다는 蓬萊山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유물들에 보이는 문양은 우리 나라 고유의 산악숭배와 더불어 신선사상 및 도교사상의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사진 3>).787)國立扶餘博物館,≪扶餘博物館陳列品圖鑑≫(三和出版社, 1981), 도판 73·74·75·76 참조.
國立中央博物館,≪特別展 金銅龍鳳蓬萊山香爐≫(通川文化社, 1994), 도판 27∼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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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山水文·山水鳳凰文塼
<사진 2>山水文·山水鳳凰文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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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金銅龍鳳蓬萊山香爐
<사진 3>金銅龍鳳蓬萊山香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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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서≫나≪통전≫등의 백제전에 따르면 백제인은 일찍부터 卜筮(著龜), 占相術을 비롯하여 음양오행에 관한 이해가 깊었던 것 같다. 부여 능산리에서 발견한 금동향로는 그 바탕이 되는 모티프를 전한시대 유물인 錯金博山爐(<사진 4>)에 두고 있으며, 그 후 백제인 기술자에 의해 새로운 창작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788)≪中國文物精華≫(北京, 文物出版社, 1992), 115圖「錯金博山爐」1968, 河北省滿城縣陵山出土. 중국 고대사회에서 분향을 위해 사용한 향로이며, 상단 뚜껑쪽의 爐蓋와 그 아래 爐盤이 있고, 이를 받치는 爐座로 구성되어 있다. 뚜껑 상단 정상에는 으레 靈鳥가 놓여져 있으며 이를 받치는 산악과 사람 및 호랑이·원숭이 등 동물이 보이며, 향로 전체를 받치고 있는 爐座에는 昇龍像이 있고 龍頭가 이를 떠받치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 구도는 백제의 금동향로와 동일하다. 그런데 향로 상부인 뚜껑쪽에는 승려상을 비롯하여 다섯 개의 산악 주봉과 5인의 악사에 의한 奏樂像(<사진 5>), 다섯 마리의 기러기(雁 혹은 鴛鴦?) 및 다섯 개의 香煙구멍, 허리쪽의 연꽃, 臺座의 용 등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서 당시 오행설에 대한 깊은 믿음과 아울러 불교·용신·산악 숭배와 같은 그들 신앙생활의 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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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錯金博山爐
<사진 4>錯金博山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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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五人奏樂像
<사진 5>五人奏樂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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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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