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때 令狐德棻 등이 편찬에 착수했다는≪주서≫이역전에는 백제의 정치제도나 풍속·신앙 등에 관한 비교적 새로운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백제 남자의 의복은 고구려와 대략 같으며, 조정에서 배례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 冠의 양끝에 깃털을 달았으며 군사가 있는 경우에는 달지 않았다. 배알의 예를 행할 때는 두 손을 모아 땅을 짚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의 의복은 袍衣와 흡사하고 소매가 약간 큰 편이었다(≪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복식에 대해 전하는 위 기사에서 남자의 경우는 고구려 복식과 비슷하였으며, 관에 깃을 꽂았음을 알 수 있다. 남자들의 관복은 국왕과 좌평 이하 솔계에 속한 제1관료군이 모두 자주빛 도포류에 속하는 공복을 입고, 제2관료군인 덕계는 붉은 빛, 그 이하 제3관료군은 청색옷을 각각 입어 외형상의 복식으로 위엄을 갖추어 백성 및 천민과 구별하였음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또한≪양서≫백제전에는 백제사람은 키가 크며 의복이 정결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삼국지≫위지 부여전에서는 부여 사람은 체구가 크고 성격이 용감하면서 근후하여 존귀한 사람을 대할 때는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아 땅을 짚었다고 하였다. 또 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사람이 부여인의 별종이며 역시 청결함을 스스로 선호하였고,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절이 있다고 하였다. 결국 부여에 바탕을 두었다는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체구와 신장이 컸던 것 같고 또한 늘 정결하며 예의를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백제 여인의 의복은 소매가 큰 袍衣같은 것이었다. 1979년도 충남대학교 박물관팀에 의하여 부여 정림사지 회랑에서 발견된 陶俑 중 籠冠을 쓴 여인상의 의복에서 소매가 넓은 도포형의 치마를 확인한 바 있다. 이를 통해 백제사회에서 예절을 갖춘 중국식 복식문화의 흐름을 찾아볼 수가 있다.789)權兌遠,<百濟의 冠帽系統考>(≪史學志≫16, 1982).
―――,<百濟의 籠冠考>(≪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1984).
혼례와 상례에 관하여≪주서≫백제전에서는 대략 중국과 같아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나머지 친족의 경우는 장례를 마치는 대로 예절이 모두 끝난다고 하였다. 또한≪수서≫백제전에는 상제가 고구려와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백제에서는≪후한서≫부여전이나≪양서≫고구려전에 보이는 흉노 등 북방 유목민족사회에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한다는 娶嫂婚(Levirate)풍과 고구려의 데릴사위(豫壻制)와 같은 혼속은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服喪制에 관하여는 일찍이 중국의 은·주시대부터 발원하였다고 전하는 3년 친상제가 그 후 1년 혹은 3개월로 줄어들고, 전한대는 36일 탈상이 조칙으로 정례가 되었다고 하며, 부여에서는 5개월, 신라에서는 1개월 탈상이라고 하였다.790)權兌遠,≪韓國社會風俗史硏究≫(景仁文化社, 1980). 과연 고구려나 백제에서 3년 복상이 어느 정도로 지켜져 내려왔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백제에서 불교수용 이후 행한 것으로 보이는 화장풍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1971년과 1972년 부여 中井里·鹽倉里의 발굴조사로 백제시대 화장묘가 밝혀졌다. 그 후 新里·軍守里·上錦里·雙北里에서 藏骨용기인 骨壺가 발견되었다. 그 결과 불교가 성행한 사비시대 이후인 백제 말기에는 화장의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791)姜仁求,≪百濟古墳硏究≫(一志社,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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