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회의 오락에 속하는 雜戱에 관하여는≪주서≫이역전을 비롯하여≪북사≫·≪수서≫백제전에 간략히 전하고 있다. 즉 投壺·圍棊·樗蒲·握槊·弄珠 등이 있었고 이 가운데 奕棊(위기와 같음)를 가장 중히 여겼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잡희류는 중국에서 이미 경서와 같은 고전에 전해 내려오고 있어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전승되어 온 중국측의 풍속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계통의 풍속은 우리 나라의 삼국시대에 해당되는 남북조시대에서 수·당시대에 걸친 교류를 통하여 백제사회에 전파되어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가) 투호
投壺에 관하여는≪禮記≫·≪大戴禮≫투호편에 간략한 설명이 전해 오고 있다. 투호는 연회가 있을 때 주인과 손님이 상대가 되어 생긴 여흥이다. 대개 단지를 뜰이나 건물내에 놓고 화살 모양의 나무를 단지 속에 던져 넣어 그 수의 다과로 승패를 정하며(<그림 1>), 패자는 벌주를 마시게 하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자는 노래로 대신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이 때 磬鼓를 울리며 시가를 읊어 좌흥을 돋우었다고도 하였다.
나) 저포
樗蒲란 본래 주사위(骰子·賽子:<그림 2>)가 가죽나무 등의 열매로 만들어졌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한대 이전에는 六博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6개의 댓가지(6箸, 길이 6寸)에 일정한 표시(숫자?)를 새겨 놓고 이를 던져 그 숫자를 산출하여 경기판(Game 盤上) 위에 놓인 바둑말[棊]을 진행시켜 상위에 도달하도록 서로 겨루는 놀이라고 하였다(<사진 6·7·8>). 그런데 저포의 명칭이 생긴 한대 이후 다섯 개의 주사위를 사용한 데서 五木의 칭이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주사위는 처음 나무로 만들었으나 후에 상아로 바뀌어 상부는 검은색, 하부는 흰색으로 표시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博이 육박류를 지칭한 것이라면 혁은 바둑(園棊·奕棊)류를 말한 것이므로 박과 혁은 별개의 것임을 뜻한다.792)尙秉和,≪中國社會風俗史≫(秋田成明 譯, 平凡社, 1974)의 제34장 各種遊戱 참조.
다) 악삭
握槊은 일명 雙陸(六)이라고도 한다. 正角 6면에 1에서 6까지의 숫자를 새긴 주사위(骰子) 한 쌍을 던져 사위대로 행마하여 먼지 입궁을 다투되, 둘이 다 6이 나면 대개 이기므로 쌍육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槊이란 바둑에서 말하는 局인 바둑판을 뜻하며, 주사위를 던져 그 결과를 두는 바둑말을 쥐고[握] 바둑판에 놓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 형태는 다르나 1975년 3월부터 1976년 12월에 걸쳐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굴 조사한 雁鴨池 유적에서 4각형 6면 혹은 3각형 8면의 참나무로 된 흑칠 주사위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주사위로부터 그 면에 새긴 글귀에 따라 노래도 하고 춤도 추었던 신라사람들의 풍류놀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793)國立中央博物館,≪雁鴨池≫(通川文化社, 1980)의 제340도, 木製주사위 참조. 중국의≪五雜俎≫등 고전에 의하면 쌍륙인 악삭은 남북조시대에 서역에서 전파되어 수·당시대 성행하였다고 하는데, 이 무렵 백제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라) 농주
弄珠에 대하여 전해 오는 분명한 기록은 관련사서에서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다. 다만 농주란 弄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있다. 즉 춘추시대 市南이라는 곳에 宜僚라는 자가 丸鈴(珠)을 잘 다루어 항상 8개는 공중에 있고 한 개는 손 가운데 있었다. 초나라가 송과 더불어 싸울 때 의료가 가슴에 칼상처를 받고도 軍陣 앞에 나가서 환령을 다루어[弄] 싸움을 그치게 함으로써 결국 초나라의 승리로 돌아가게 했다는 것이다.794)≪六堂 崔南善全集≫권 3(玄岩社, 1973).
한편 고구려 藥水里壁畵古墳 行列圖에 보이는 곡예도와 水山里의 벽화고분의 그림 가운데 마디가 있는 작은 나무봉과 2개 내지 5개의 공을 공중에 던지는 곡예사의 그림에서 농주의 한 사례를 찾아볼 수가 있다795)呂南喆·金洪圭,≪高句麗の文化≫(同朋舍, 1982).(<그림 3>). 그것이 백제사회에 전파되면서 어떠한 형태로 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고구려사회의 곡예류에 속한 오락풍속이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마) 위기
중국 晋代 張華가 지었다고 전하는≪博物志≫에 의하면 위기(圍棊·奕棊·圍碁)의 기원은 堯가 그 아들 丹朱에게, 또는 舜이 역시 그 아들 商均에게 가르쳤던 데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위기, 곧 바둑은 중국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오락풍인 것 같다. 그런데 당나라 때의 孔穎達이≪疏≫에서는 위기를 혁이라고 하는데, 棋者가 바둑돌을 잡고 상대를 둘러싸서 죽이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육박이 바둑말[棊 또는 碁]을 사용하며 흑·백이 있고, 바둑판[局]에도 길[道]이 있다는 데서 같은 종류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博奕은 12도이며 흑·백이 각각 6개인데, 혁기인 위기(<그림 4>)는 300개가 되므로 상대방을 포위하여 이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백제에서 바둑을 즐긴 사람으로는 개로왕이 유명하다. 즉 박혁인 바둑을 즐겼던 개로왕을 기만한 고구려 승려이며 바둑의 명수 道琳과의 대국사화가 전한다.796)≪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21년 9월. 또 신라에서도 효성왕은 즉위하기 전에 賢士 信忠과 궁정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상대하여 후일을 기약하기도 하였다.797)≪三國遺事≫권 5, 避隱 8, 信忠掛冠. 이로 본다면 삼국시대에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바둑을 즐겼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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