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서 騎射의 풍을 중히 여겼다고 한 기록은 역시≪주서≫나≪통전≫백제전에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송서≫백제전에서는 (劉)宋의 문제가 보내준 腰弩를 비롯하여 무기류로 弓·箭·刀·矟(長矛)이 있었다고 하였다. 더욱이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때 이미 精騎 혹은 勁騎와 같은 날쌘 기병들이 전투하였던 것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성왕 7년(529)에는 왕이 고구려 안장왕의 군사를 맞이하여 3만이 되는 보병과 기병으로 싸웠다고 하였다. 따라서 평소에는 수렵을 행하였고, 유사시에는 기병전이 있었기에 기사의 풍습을 귀히 여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부여에서 발견된 금동향로 상단 뚜껑쪽에 새겨진 기마인은 첫째 말의 머리부분[面簾] 및 볼기부분[馬簾]을 보호와 의례적 목적으로 가린 것으로 보이는 甲騎(具裝) 모습과(<사진 9>), 둘째 말 위의 인물에서 전한시대 山東省 嘉祥縣宋山畵像石 등에 보이는 기마상(<사진 10>)과 같이 冠幘으로 보이는 관모를 쓰고 소매가 넓은 濶袖形 포의를 입었으며, 다리부분을 가린[帶披脚] 모습을 하고 있다.798)山東博物館·山東文物考古硏究所,≪山東漢畵像石選集≫(山東, 齊魯書社, 1982), 嘉祥縣宋山畵像石 圖版 182·189. 이는 당시에 의례적이며 위무가 당당했던 백제인들의 기마풍을 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고구려 舞踊塚과 長川 1호벽화고분에도 騎射(狩獵)상이 보인다(<사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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