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하대에 지방호족이 대두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禪宗이 크게 유행하자 敎宗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景德王대에 表訓은 하늘과 지상을 오르내리면서 천기를 누설하였으므로 天帝가 하늘 문을 막아, 이후로부터 신라에서는 성인이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334)≪三國遺事≫권 2, 紀異 2,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이것은 교종 불교가 떨치지 못함으로써 표훈 이후에 유명한 승려가 나오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緣起說話이다.
그러나「黙守」를 내세우는 선종은 교종의 논리를 초월하려는 것이며, 그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어서, 空觀의 이해와 實踐修行을 함께 修學하는 華嚴思想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다. 대체로 초기의 禪師들은 화엄사상에 심취했다가 그 논리의 한계를 깨닫고 선종 수행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신라 하대에 화엄종 승려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
의상은 十刹에 傳敎할 것을 명했는데, 10찰은 太伯山의 浮石寺, 伽耶의 海印寺, 毗瑟山의 玉泉寺, 金井山의 梵魚寺, 智異山의 華嚴寺, 鷄龍山의 岬寺, 毋岳山의 國神寺, 中岳 公山의 美里寺, 迦耶峽의 普願寺, 朔州의 華山寺이다. 이러한 10찰은 신라 義湘系 화엄종에 속해 있었으므로 신라 하대에 華嚴宗勢가 계속 유지되어 왔음을 알려준다. 10찰을 중심으로 화엄종 승려들이 상당히 활동했을 것이지만, 그들의 활동을 알 수 있는 것은 해인사의 경우에서이다. 왜냐하면 崔致遠이 해인사와 깊은 인연을 맺으면서 거기에 住錫한 승려들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신라 하대에 화엄종 승려들의 활동이 계속 이어져 갔다. 元聖王대에는 화엄종 승려로 생각되는 智海·妙正·緣會 등이 있었다. 지해는 皇龍寺에서≪華嚴經≫을 5旬 동안 강론하였다. 지해의 법회에 참가한 묘정은 신라 왕실과 친밀하여 使臣의 행렬에 포함되었고, 唐에 파견되어 唐帝를 알현하기도 하였다.335)≪三國遺事≫권 2, 紀異 2, 元聖大王. 연회는<僧傳>에 憲安王대의 인물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지만, 원성왕대에 靈鷲寺에 머물면서<朗智傳>을 찬술하였다.336)≪三國遺事≫ 권 5, 避隱 8, 朗智乘雲 普賢樹.
연회는 그 이름에서 화엄종 승려인 것을 알려주지만, 그 외에도 중국 淸凉山과 얽힌 연기설화를 지닌 영축사에 주석하였으며, 또한 그 곳을≪화엄경≫의 十地 중 法雲地로 자처한 점 등으로 미루어 화엄종 승려임이 분명하다. 연회는 원성왕이 國師로 봉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멀리 떠나 숨으려 하였다. 그러던 도중에 文殊大聖과 辨才天女의 깨우침으로 말미암아 다시 돌아와 국사에 봉해졌다.337)≪三國遺事≫권 5, 避隱 8, 緣會逃名 文殊岾.
연회뿐 아니라 애장왕대에는 正秀가 또한 王師에 봉해졌다가, 이어 국사에 봉해졌다. 정수는 걸식하는 한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서 얼어 죽어가자, 자기의 옷을 벗어 덮어 줌으로써 그들을 소생시켰다.338)≪三國遺事≫권 5, 感通 7, 正秀師救氷女. 물론 정수가 반드시 화엄종 승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황룡사 沙門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화엄종 승려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가 교종 승려였음은 분명하다.
신라 하대에 화엄종 승려가 국사에 봉해지거나 또는 교종 승려가 여전히 국사에 봉해지고 있었던 것은, 당시까지도 화엄종 내지 교종 세력이 강인하게 溫存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래서인지 신라 하대에 선종이 유행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선사들이 화엄사상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曦陽山門의 開祖인 智證 道憲은 처음 의상계 화엄종의 門徒였던 梵體大德에게 출가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瓊儀律師에게 具足戒를 받았으며, 浮石山으로 들어가 불교를 익혔다. 신라 하대에 선사들의 대부분은 처음 화엄사상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해인사를 창건한 자는 順應이며 그 佛事는 利貞에 의해 완성되었다. 또 비슷한 시기인 900년 경에 賢俊과 定玄이 해인사에 住錫하고 있었다. 또한 9세기 후반에 景文王의 청에 의해 決言은 鵠寺에 주석하면서, 그것을 중창하여 元聖大王의 명복을 빌기 위한 大崇福寺로 개칭하였다. 결언이 해인사에 거주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나말에 해인사에는 화엄종의 두 司宗이 있었다. 한 사람은 觀惠公으로 후백제의 渠魁인 견훤의 福田이 되었고, 또 한 사람은 希朗公으로 고려 태조의 복전이 되었다.
두 사람은 信心을 받으면서 香火願을 청했는데, 이미 願함이 달랐으니 마음인들 하나일 수 없었다. 그 후 문도에 이르러서는 점차 물과 불이 되어 갔다. 하물며 法味가 각각 달리 전수되었으니, 그 폐단이 오래되어 없애기 어렵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관혜공의 法門을 南岳으로, 희랑공의 법문을 北岳으로 불렀다.339)赫連挺,<均如傳>4, 立義定宗分者. 이러한 남·북악의 대립은 고려초에 북악의 法孫인 均如에 의해 統合되었는데, 적어도 신라말에는 화엄종이 남악과 북악으로 나뉘어 교리 논쟁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1977년에 통일신라시대의≪화엄경≫을 寫經한 두루말이가 학계에 알려져 그것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신라말 화엄종 내의 대립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이 두루말이는 唐譯 80권≪화엄경≫을 사경한 것인데, 景德王 14년(755)에 완성되었다.340)文明大,<新羅 華嚴經 寫經과 그 變相圖의 연구>(≪韓國學報≫14, 1979), 53쪽. 이로 말미암아 화엄사의 緣起祖師가 실존 인물임이 밝혀지기에 이르렀고, 의상의 화엄사상에 대한 대립적인 존재로서 연기의 화엄사상을 설정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 화엄의 주류가 의상계였다면 비주류는 연기계이었으며, 북악파가 태백산의 부석사를 근거로 한 의상계였다면, 남악파는 지리산의 화엄사를 근거로 한 연기계의 화엄종이었다고 했다.341)崔柄憲,<고려시대 華嚴學의 變遷―均如派와 義天派의 대립을 중심으로―>(≪韓國史硏究≫30, 1980), 66쪽.
신라말의 남·북악파의 대립을 북악인 浮石寺를 중심으로 하는 화엄종과 남악인 화엄사를 중심으로 하는 화엄종파 간의 대립으로 보는 관점에 서 있으면서도, 이와는 달리 파악하여 북악파가 의상계라면 남악파는 法藏系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決言·賢俊·최치원 등이 법장의 화엄학을 강조하였음을 들면서, 남·북악의 대립은 의상계와 법장계의 오랜 갈등이 그 배경이 된 것이며, 남·북악 화엄 교학의 차이는 의상의 화엄 교학과 법장의 그것과의 차이를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342)金相鉉,<新羅 華嚴學僧의 系譜와 그 活動>(≪新羅文化≫1, 東國大 新羅文化硏究所, 1984), 81∼82쪽. 곧 의상의 화엄 교학이 실천적인 것임에 비해 법장의 그것은 衒學的이라는 것이다.343)金相鉉, 위의 글, 83쪽. 사실 이러한 지적은 화엄종의 주류인 의상계 외에 비의상계가 있었다344)金知見,<新羅 華嚴의 系譜와 思想>(≪學術院論文集≫人文社會篇 12, 1973).
―――,<新羅 華嚴學의 主流考>(≪崇山朴吉眞博士華甲紀念 韓國佛敎思想史≫, 1975).는 사실을 확인해 준 셈인데, 그러한 주류와 비주류의 대립이 신라말에까지 존재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신라 중대에 화엄종의 주류는 의상계였으며 방계로 원효계는 물론 慈藏系도 있었을 법하다. 다만 신라 화엄종의 비의상계를 緣起系나 法藏系라 하여, 그것을 남악파와 연결시키려는 경향은 보다 철저한 사료의 검증을 거쳐 이루어졌으면 한다. 사실 남·북악파의 분열을 알려주는<균여전>의 분위기는 그것이 의상계 華嚴宗團 내에서 계파로 나뉜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신라말에 해인사는 의상계 문도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므로, 해인사 내에 거주하는 문도들의 대립은 의상계 내의 문도들의 사상 경향의 차이에서도 고려되어야 하며, 이러한 사료의 분위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경우 왜 그렇게 기록되었을 지에 대한 충분한 자료 검토를 선행해야 할 것이다.
신라 중대 초기에 성립하는 화엄 교단 내의 주류와 비주류의 대립은 나말에까지 계속해서 그대로 내려왔을 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한편 의상의 화엄사상은 전체보다는 가장 근본적인「하나」를 중시하려는 橫盡法界論을 펴면서 性起論的 입장을 견지하였다. 반면 법장의 화엄사상은 원칙적인 하나 보다는 전체의 각 부분 부분을 아울러 중시하려는 竪盡法界論을 펴면서 緣起된 諸法相의 차별을 하나 하나 부각시켜 가려 하였다. 이렇듯 서로 대조적이어서, 후대의 화엄 사상가들은 어느 누구라도 의상과 법장의 화엄사상을 절충하고 조화하는 면에서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따라서 의상계 승려로서 법장의 화엄사상 경향을 받아들이려는 입장은 충분히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법장계 화엄종파의 存續으로 상정하여 의상계 화엄종파와의 끈질긴 대립으로 파악하려는 문제도 재고하여야 할 것이다. 어쩌면 최치원이<義湘傳>과 아울러<法藏傳>을 찬술하고 있는 태도는 그 두 사상 경향의 융합과 절충을 의도한 때문에 나타났을 것이다.
신라말 오대산의 華嚴結社에는 오히려 화엄 종단 내의 주류와 비주류가 함께 참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본래 오대산은 자장의 문수신앙을 배경으로 설정되었는데, 그가 말년에 문수 眞身을 기다렸던 淨岩寺가 있던 곳은 지금의 영월군에 속해 있다. 그 뒤 오대산 신앙은 월정사를 중심으로 지금의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에 각각 결사하여 성립되었다. 오대산 결사의 성립을≪三國遺事≫에서는 聖德王 4년(705)이라 하였다.345)≪三國遺事≫권 3, 塔像 4, 臺山五萬眞身. 아마 이 때에는 五臺 중 中臺인 眞如院이 開創되었을 법하다.
문수의 常住處였던 오대산은 뒤에 5대의 각 대에 진신이 상주하는 곳으로 되었다. 곧 東臺에 觀音, 南臺에 地藏, 西臺에 無量壽, 北臺에 釋迦, 中臺에 文殊가 거주하였다. 오대산의 다섯 頂上이 각각 5如來의 상주처로 된 것은 唐 澄觀에 의해서였다. 또 그것이 여래의 住處地로 되는 과정에서 密敎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오대산 신앙을 밀교의 도량으로 성립시킨 자는 당의 不空이다.346)朴魯俊,<唐代 五臺山信仰과 不空三藏>(≪嶺東文化≫3, 關東大 嶺東文化硏究所, 1988), 34∼35쪽. 징관과 불공이 생존했던 시기는 8세기 중엽이므로 신라 오대산 사적이 확립되는 시기는 하대에 가서야 가능해진다. 특히 월정사 내지 오대산 사적에 깊이 연고되어 있는 信義나 有緣·信孝 등은 신라말에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5대의 결사는 한꺼번에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시대를 달리하여 각각 이루어졌다. 그 결사가 완전히 갖추어지는 것은 왕건에 의해서였다. 고려말 閔漬가 撰한<五臺佛宮山中明堂記>에 의하면, 왕건이 월정사로 法燈이 전해진 오대산의 각 臺에 특별히 供養하여, 그것을 恒規로 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347)閔漬,<五臺佛宮山中明堂記>(李能和 編,≪朝鮮佛敎通史≫下, 新文館, 1918), 138쪽.
오대산 신앙 속에는 자장의 사상 전통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자장이 말년에 은거하여 문수의 진신을 보려 했던 淨巖寺는 오대산 신앙의 중심 道場인 월정사가 아니며, 또 그는 문수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죽어 갔다. 자장은 처음 오대산 신앙과 반드시 밀착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뒤에 월정사 중심의 오대산 신앙이 결성될 때에 자장계 불교 신앙이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오대산 신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의상계 화엄종이었다. 동대에 관음이 중요시된 점이나 5대의 각각에 圓通의 부처상을 모시는 점 등은 의상계 화엄사상의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오대산 사적의 성립에 실제로 깊이 관여한 자는 신효인데, 그는 의상계에 속한 인물로 생각되며, 그 뒤 월정사에 거주하는 유연이나 신의 등도 의상계 화엄종에 속한 인물로 파악된다. 또 자장은 말년에 의상계 화엄종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는데,348)金杜珍,<慈藏의 文殊信仰과 戒律>(≪韓國學論叢≫12, 國民大 韓國學硏究所, 1990), 28쪽. 오대산 사적에서는 자장계와 다른 불교 종파의 반목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점은 오대산 사적이 형성될 당시에 자장계와 의상계 화엄종 사이의 갈등은 정리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