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2. 불교의 변화
  • 2) 선종의 흥륭
  • (2) 선종 유행의 사회적 기반
  • 나. 선사들의 신분과 단월세력

나. 선사들의 신분과 단월세력

 선사들은 중앙의 지배층에서 몰락한 六頭品 이하의 하급 귀족 출신이거나 중앙 진출이 불가능한 지방호족 출신이다. 나말여초에 선종 승려로 30인 정도의 비문이 전하고 있어 그 행적을 알 수 있는데, 그 중 약 절반이 金氏이다. 아마 김씨가 아닌 나머지는 6두품 이하의 신분층에 속해 있었고, 김씨라 하더라도 王都 출신이 아닌 선사들은 6두품 이하의 신분층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崛山寺 梵日의 祖父인 述元이 溟州도독을 지냈으며, 實相寺 秀澈의 曾祖父는 蘇判을 지낸 진골이었다.

 이들은 아마도 조부 때까지만 하더라도 진골이었으나 6두품으로 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朗慧의 가계는 본래 진골이었으나 그 아버지 範淸 때에 6두품으로 떨어지고 있는데,374)崔致遠,<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朝鮮金石總覽≫上, 1919), 74쪽.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다. 낭혜가 무열왕의 8대손이어서 七世代 동일 친족 집단의 傍系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거나,375)金哲埈,<新羅時代의 親族集團>(≪韓國史硏究≫1, 1968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163∼164쪽). 아니면 범청이 金憲昌의 亂에 가담했었기 때문에 난이 평정된 후 6두품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376)金杜珍, 앞의 글(1973), 26∼27쪽.

 9산문 중 비교적 먼저 성립된 실상산문의 건립에 宣康太子나 端儀長翁主(경문왕의 누이)와 같은 왕실세력이 관여하기도 하였지만, 9산선문은 지방호족의 세력 기반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迦智山門의 건립에 金彦卿 등 중앙 귀족이 관여하였는데, 당시의 선강태자나 중앙귀족들도 왕위쟁탈전에서 패퇴하였을 경우, 낙향호족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377)高翊晉,<新羅下代의 禪傳來>(≪韓國古代 佛敎思想史≫, 東國大 出版部, 1989), 535쪽. 曦陽山門은 沈忠과 加恩縣 장군인 熙弼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鳳林山門의 건립에는 進禮城 軍主인 金律熙와 金海府 進禮城軍事 明義將軍인 金仁匡 등 加耶系 김씨 세력이 관여하였으며, 須彌山門의 건립에는 왕건 및 그 외척인 皇甫氏 세력이 후원하고 있었다. 보령은 金仁問의 受封地로서 그 후손인 金昕의 세력 근거지였으며, 그가 聖住寺를 건립하고 낭혜를 주지하게끔 하였다. 김주원계 세력을 배경으로 실제 강릉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王順式은 굴산문을 후원하고 있었다.

 9산문의 선사들은 때때로 왕실의 부름을 받고 이에 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왕실과의 관련보다 지방호족과의 연계에 더 유의하였다. 경문왕의 부름에 응한 낭혜나 大通·智證 등이 왕실에 계속 머물지 않고 산문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그 뒤의 부름에는 아예 응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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