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宗山門의 규모는 대단히 크다. 성주사는 佛殿 80칸, 행랑 800여 칸, 水閣 7칸, 庫舍 50여 칸으로 무려 1,000칸에 이르는 거대한 사찰이었다.378)<崇巖山聖住寺事蹟>(≪文化財≫4, 1969). 사자산문의 折中 澄曉大師塔碑의 건립에는 강릉·원주·竹山·공주·제천·진천·예천 등의 지방 세력과 촌주가 동원되었다. 곧 사자산문의 세력은 강원도 일대는 물론, 멀리 충청도 지역까지 미치고 있었다. 가지산문의 후원자인 金彦卿은 私財로 鐵 2,500근을 내어 盧舍那佛 1軀를 주조하고는, 望水里 南里宅으로부터 금 160分과 租 2,000斛을 공출하여 그것을 장식하였다.
선종 사원은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경문왕 12년(872)에 세워진 桐裏山의 慧哲大師碑에 의하면, 당시 泰安寺에는 2,930石 4斗 5升 5合의 식량을 비축하고 있었으며, 田畓이 494結 39負 있었고, 坐地가 3결, 下院代가 4결 72부, 柴地가 143결, 鹽盆이 43결이었으며, 그 밖에 奴가 10인, 婢가 13인, 福田이 40인이나 있었다고 한다. 희양산문의 토지는 동리산문의 그것보다 더 많았다. 지증대사비에 의하면 도헌은 희양산문을 개창하기에 앞서 경문왕 4년에 단의장옹주가 자신의 受封地인 토지와 노비를 사원에 기증함을 보고 감격하여, 莊 12區, 토지 500결을 이 절에 희사하였다. 성주산문의 토지는 이 보다 더 많았지만, 다른 산문의 토지도 이와 비슷했다.
희양산문에 딸린 막대한 토지는 12개소의 莊舍로 나뉘어져 있었으므로, 사원에 딸린 莊園은 여러 개의 장사를 갖고 있었다. 나말여초에 雲門寺는 왕건으로부터 500결의 토지를 받았는데, 거기에 딸린 장생표가 東嘉西峴·西北買峴·南阿尼岾 등 11개 지역에 있었으므로, 그 토지는 11개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379)金杜珍,<王建의 僧侶結合과 그 意圖>(≪韓國學論叢≫4, 1981), 142∼143쪽. 장원에 딸린 장사의 경영에는 소속 승려를 知莊으로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경기도 豐德이거나 아니면 영월에 있었다고 추측되는 世逵寺의 장사가 강릉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本寺에서는 僧 調信을 지장으로 파견하여 경영하였다.380)≪三國遺事≫권 3, 塔像 4,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선종 사원에서는 많은 문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성주산문의 경우 낭혜의 이름있는 제자가 2,000인이나 되었으며, 麗巖의 제자가 500인, 玄暉의 제자가 300인이나 되었다. 迦智山門 體澄의 門人으로 英惠 등 800여 인이 있었고, 眞空의 제자가 400여 인이 되었다. 실상산문 洪陟의 門徒로 1,000여 인이 있었고, 秀澈의 문인으로 수백 인이 있었다. 봉림산문 審希의 문인에 500인이 있었고, 燦幽의 제자가 500인이었다. 동리산문 혜철의 제자는 수백 인이었다. 사자산문 折中의 제자에 1,000인이 있었고, 굴산문 行寂의 문인으로 500인이 있었다. 적게는 수백 인에서 많으면 2,000인에 이르기까지의 선종산문에 소속된 문도는 상인이나 流亡 농민은 물론, 심지어 群賊의 무리까지를 포용하고 있었다.381)崔柄憲,<新羅下代 禪宗九山派의 成立>(≪韓國史硏究≫7, 1972), 111∼112쪽.
신라 하대의 동란기에는 곳곳에 군적의 무리들이 있었고, 이들이 당시 비교적 부유한 사원을 약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낭혜·현휘·도헌·절중·윤다의 비문에는 이들이 住錫한 각 산문에 군적이 침입하였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전한다. 특히 그 중 藍浦의 군적이 성주산문에 쳐들어왔으나 낭혜의 설법으로 100인이 출가하여 道를 얻게 되었다. 군적의 무리가 산문 세력으로 흡수되는 데에는 산문 자체가 무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되고 있다.382)金杜珍, 앞의 글(1973), 34∼35쪽. 밀양의 奉聖寺에 머물고 있던 寶壤의 戰略에 따라, 왕건은 청도 지방에서 후백제 세력을 크게 물리치고 있다. 보양은 雲門宗 계통의 선승이었는데, 전략을 겸비하고 있음은 선종 사원 자체의 무력을 통솔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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