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개창된 것은 實相山門이다. 開祖者 洪陟의 자세한 행적은 알기 힘들다. 그도 중국 서당 지장의 법을 얻어 흥덕왕 6년(826)에 귀국하였는데, 宣康태자의 도움을 받았다. 홍척은 흥덕왕 5년 무렵에는 지리산에 잠시 머물렀으며, 희강왕 원년(836) 경에는 설악산으로 이주하였다. 이 때 秀澈이 그의 문하로 들어왔다. 뒤에 어느 왕 때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왕실의 부름이 있자 수철은 스승을 수행하여 경주에 이르기도 하였다.385)추만호, 앞의 책, 77쪽.
수철은 端儀長翁主의 도움을 받아 실제로 실상산문을 성립시켜 갔다. 홍척 당시에 실상사라는 寺名이 나타나 있지는 않았다. 수철이 홍척의 문하로 들어간 이후 그가 머무르거나 관련이 있는 절은 지리산의 知實寺, 양주의 深源寺, 그의 제자들이 지리산 북쪽에 세운 法雲寺 등을 들 수 있다. 아마 수철은 그 중 지실사를 확장하여 실상사로 개칭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386)추만호, 위의 책, 78쪽. 봉림산문의 개조자인 현욱이 희강왕 2년부터 4년 동안 남악 실상사에 머물다가 혜목산으로 옮겼다. 9산선문 중 실상산문은 비교적 왕실과 밀착되었다.
수철 외에 홍척의 제자로 片雲이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편운의 浮屠塔이 지금 실상사의 남쪽 曹溪庵 舊址에 있는데, 그 정면에 ‘創祖洪陟弟子 安峯創祖 片雲和尙浮屠’라는 銘文이 있다. 곧 편운은 실상사에서 分立하여 安峯寺의 開山祖가 되었다.387)金映遂, 앞의 글, 152쪽. 수철의 제자로 飮光이 있었으며, 그가 수철화상의 비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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