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2. 불교의 변화
  • 2) 선종의 흥륭
  • (3) 선종산문의 성립
  • 다. 동리산문

다. 동리산문

 서당의 법을 받아 개창한 나머지 하나는 桐裏山門이다. 개조자 慧哲은 신무왕 원년(839)에 중국으로부터 돌아와서 泰安寺를 건립하여 거주하였는데, 처음에는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늦어도 문성왕 8년(846)부터 혜철이 주지로 있던 古寺였던 태안사가 동리산문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문성왕이 그에게 나라를 다스릴 施策을 묻자 封事 몇 條를 올렸는데, 그것이 모두 施政의 急務라 하였다.

 혜철에게는 道詵과 □如라는 제자가 있었다. □여는 혜철의 태안사를 이어 받았으나 그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의 제자에 廣慈 允多가 있다. 윤다는 왕건의 귀의를 받았는데, “道는 몸 밖에 있지 않고 佛은 마음 속에 있다”고 했다. □여와는 달리 도선은 태안사에 머무르지 않고 광양에 玉龍寺를 다시 건립하였다. 풍수지리에 정통한 도선의 행적은 신비에 쌓여 있는 면이 많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도선은 개성 중심의 풍수지리를 제창함으로써, 왕건이 고려 국가를 건설하여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이념을 제공하였다고 주장되었다.388)崔柄憲,<道詵의 生涯와 羅末麗初의 風水地理說>(≪韓國史硏究≫11, 1975), 121∼125쪽. 지금 남아 있는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은 개성 중심임이 사실이나, 당시의 모든 풍수지리설이 개성 중심의 것만 있지는 않다는 주장도 있다. 오히려 그것은 지방을 明堂이라 함으로써 지방호족 세력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가졌기 때문에, 지방호족은 저마다의 풍수지리설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389)金杜珍,<羅末麗初 桐裏山門의 成立과 그 思想―風水地理思想에 대한 再檢討―>(≪東方學志≫57, 1988), 44∼45쪽.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뒷날 부회되면서 동리산문 계통의 사찰을 정확하게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米山右寺·道詵寺·三國寺·雲巖寺 등이 동리산문에 속한 사원이며, 대체로 구례·곡성·광양·영암 등 동부 全南 지역 일대에 퍼져 있었다. 그외 남원의 穿道寺와 전주의 南福禪院 등이 동리산문에 속해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선의 제자인 慶甫는 진성왕 6년(892)에 중국에 들어가 洞山良价의 제자인 匡仁의 法印을 받고, 景明王 5년(921)에 甄萱의 도움을 받아 귀국하여 전주 남복선원에 머무르고 있었다.390)金廷彦,<玉龍寺洞眞大師寶雲塔碑>(≪朝鮮金石總覽≫上), 191쪽. 이 때 그는 분명히 견훤과 연결되어 있었다. 도선 계통의 풍수지리가 일찍부터 개성 중심이었다는 데 대하여 의심을 제기할 수 있다. 936년에 경보가 왕건과 만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왕건과 연결되는 것은 아마 뒤에 다시 白鷄山 옥룡사로 이주하고 난 뒤였다. 어쩌면 그는 견훤의 귀순 전까지는 왕건과 연결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경보가 왕건 쪽으로 降附하게 되는 것은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되는 935년 전후일 것이다. 태안사의 주지였던 允多는 경보보다 일찍 왕건과 연결되었다. 이후 경보와 윤다는 고려 왕실의 귀의를 받았는데, 특히 윤다는 황주 皇甫氏와 돈독한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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