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2. 불교의 변화
  • 2) 선종의 흥륭
  • (3) 선종산문의 성립
  • 라. 사자산문

라. 사자산문

 獅子山門은 道允에 의하여 개창되었다. 도윤은 헌덕왕 17년(825)에 중국에 들어가, 馬祖의 제자인 南泉 普願의 법을 받아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하였다. 그는 한때 楓岳에 거주하면서 경문왕의 귀의를 받았으나 綾州의 雙峰寺로 이주하였다. 그의 제자에 折中이 있는데, 사자산 禪師 釋雲의 청으로 興寧禪院에 머무르게 되면서, 헌강왕과 정강왕의 귀의를 받았다. 사자산문으로 크게 발족되는 것은 이 때부터였다.

 절중은 도윤의 法印을 이었으면서도, 慈忍이나 圓朗선사 大通과의 교류를 통해 성주산문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또한 개청의 제자인 弘㑣大德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사자산문은 주위의 큰 산문과도 연결되어 있었다.391)朴貞柱,<新羅末 高麗初 獅子山門과 政治勢力>(≪震檀學報≫77, 1994), 15∼16쪽. 절중 이후 사자산문은 신라왕실의 귀의를 뿌리치고는 지방호족과 연계하였다. 진성왕 5년에 그는 興寧寺에서 南行하여 武府(지금의 광주)에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올라와 守珍(지금의 강화)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왕이 그를 국사로 봉하고자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절중은 孝恭王 4년(900)에 입적하지만, 그의 비는 이후 44년이 지난 고려 惠宗 원년(944)에 흥령사에 건립되었다. 그의 비가 건립되는 데에는 뒤에 光宗으로 왕위에 오르는 堯는 물론, 그와 대립 관계에 있던 王規 세력을 비롯해서 명주와 廣州의 호족세력이 많이 참가하였다.392)朴貞柱, 위의 글, 31∼35쪽. 절중의 제자에 慶猷·如宗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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