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住山門은 朗慧에 의하여 개창되었다. 낭혜는 설악산 五色石寺에 나아가 法性선사에게서 得道하였으며, 부석사 釋登大德에게서 화엄경을 수학하였다. 그는 헌덕왕 13년(821)에 중국에 들어가 馬祖의 제자인 麻谷 寶徹의 법인을 받아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고는, 같은 무열왕계의 후손으로서 남포 지역의 호족인 金昕과 결합하여 성주산문을 열었다. 낭혜는 무열왕의 8대 후손으로서 진골 신분에서 강등된 六頭品 출신이었다. 김흔은 신무왕의 반정을 둘러싼 왕위쟁탈전에서 그의 사촌 형제인 魏昕과 더불어 대립하였다. 이 싸움에서 민애왕을 도운 김흔은 중앙에 있지 못하고 지방의 세력 근거지인 보령으로 내려 갔다.
성주산문은 김흔이 김인문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것을 경영하기 위해 개창되었는데, 당시로서는 거대한 재력과 인력을 갖추고 있었다. 낭혜는 지방에서 독자의 산문을 이루었지만 처음에는 왕실의 부름에 응하기도 하였다. 경문왕 11년(871)에 왕실의 부름을 받아 대궐에 이르렀으며, 곧 이어 왕실이 경영한 尙州의 深妙寺를 禪那別館으로 만들어 그 곳에 거주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낭혜는 헌안왕과 정강왕의 귀의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끝내 왕실보다는 지방호족과의 결연에 더 유의하였다.
나말여초에 성주산문이 가장 번창하여 낭혜의 제자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여엄·대통·深光·慈忍·靈源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대통은 문성왕 18년(856)에 중국에 들어가 仰山 澄虛의 法印을 받아, 경문왕 원년(866)에 귀국하였고 忠州 月光寺에 거주하였다. 월광사는 무열왕계 후손의 경제적 도움을 받은 道證에 의해 창건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성주산문과 연결된 절이다. 여엄은 중국에 들어가 雲居의 법인을 받아 효공왕 13년(909)에 귀국하면서, 康萱 및 왕건과 연결되었다. 낭혜의 법인을 정통으로 계승한 자는 심광인데, 그에 대해서는 자세한 행적을 알기 힘든다.
심광의 제자인 玄暉는 효공왕 10년(906)에 중국에 들어가 道乾(아마 道虔)의 법인을 받아 태조 7년(924)에 귀국하였는데, 왕건의 귀의를 받아 國師에 봉해졌고 충주 淨土寺에 거주하였다. 정토사는 고려 통일 이전에 이미 왕건의 세력권 내에 들었던 사원이겠지만, 직접적으로는 忠州劉氏들에 의해 경영되었다.393)蔡尙植,<淨土寺址 法鏡大師碑 陰記의 分析―高麗初 地方社會와 禪門의 構造와 關聯하여―>(≪韓國史硏究≫36, 1982), 43쪽. 이 때 현휘는 왕건을 위해「法王의 敎化」에 대해 강론하면서, 賢士를 등용하는 문제 등 구체적인 정책을 건의하였다. 또한 그는 특히 선종사상의 입장에서 화엄사상을 융합하려는 사상 경향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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