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2. 불교의 변화
  • 2) 선종의 흥륭
  • (3) 선종산문의 성립
  • 바. 굴산문

바. 굴산문

 崛山門은 梵日에 의해 개창되었다. 그는 흥덕왕 6년(831)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鹽官 齊安의 법인을 받아 문성왕 8년(846)에 귀국하였다. 굴산문의 단월은 金周元系 세력이었다. 김주원은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들 중 金憲昌이나 손자인 梵文은 신라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다른 후손들, 예를 들어 宗基나 그 아들인 璋如·貞茹 등은 신라 정부에 협조하여 중앙 정계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굴산문의 단월 세력인 김주원계는 반신라적 성향을 가지면서도 중앙 정계에 실력자로 참여하고 있었으며, 주위의 여건이 달라지면 언제라도 신라 정부에 등을 돌릴 수 있었다.

 굴산문의 단월 세력은 이와 같이 二律的인 성격을 가졌고, 또 그 교단의 세력 규모가 컸다. 강릉의 굴산사 외에 春川의 建子庵을 비롯하여 봉화의 太子寺, 삼척의 三和寺 등 영동 일대에 그 세력이 미치고 있었으며, 이 지역 내에 있었던 화엄종 사찰은 굴산문 소속으로 흡수되어 갔다. 그래서인지 범일의 입적 후 굴산문 내에는 서로 다른 길을 추구하는 교단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장선원은 반신라적 성향을 지녔는가 하면, 태자사는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범일의 제자에 行寂·開淸·信義 등이 있었다. 행적은 경문왕 10년(870)에 중국에 들어가, 石霜 慶諸의 법인을 받아 헌강왕 11년(855)에 귀국하였다. 처음 그는 김해부의 金忠子(蘇忠子)·金律熙(蘇律熙)의 후원을 받았고, 신덕왕 4년(915)에 왕의 요청으로 實際寺에 거주하였는데, 이 절은 왕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행적은 곧 이어 石南山寺로 옮겨 주석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석남산사는 奉化에 있었던 太子寺이다. 개청은 범일의 문하에 있다가 진성왕 3년(889)에 강릉 地藏禪院에 거주하였는데, 이 때 溟州軍事 王順式과 인연을 맺었다. 지장선원을 후원하고 있는 왕순식은 김주원의 후손으로 생각된다.394)金杜珍,<新羅下代 崛山門의 形成과 그 思想>(≪省谷論叢≫17, 1986), 310∼312쪽. 궁예가 강릉을 점령하였을 때 일부 김주원계 세력의 협조를 얻었는데, 왕순식도 그런 세력 중에 포함될 수 있다.395)金杜珍, 위의 글, 315쪽. 궁예의 세력권 내에 있었기 때문에 개청은 왕건과 결연되는 시기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신의는 五臺山 慈藏의 舊居(후의 月精寺)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로 보면 굴산문은 강릉과 오대산 일대에 세력을 미치고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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