鳳林山門의 개창자는 玄昱이다. 그는 헌덕왕 16년(824)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章敬 懷暉의 법인을 받아 희강왕 2년(837)에 귀국한 뒤, 경문왕의 청으로 慧目山의 高達寺에 거주하였다. 그의 제자에 審希가 있다. 심희는 舊加耶 왕족의 후예인 新金氏로서 그의 신분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 어렵게 되자, 당시 경문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현욱에게 출가하였다.397)曺凡煥,<新羅末 鳳林山門과 新羅王室>(≪震檀學報≫78, 1994), 45∼49쪽. 심희는 혜목산에서 松溪禪院으로 나아가면서 진성여왕의 청을 거절하고, 김해 지방의 加耶系 김씨 세력인 金仁匡·김율희 등과 연결하여 봉림사를 열었다.398)崔柄憲,<新羅末 金海地方의 豪族勢力과 禪宗>(≪韓國史論≫4, 서울大, 1978), 403∼404쪽.
심희가 왕실의 청을 거절한 것은 송계선원의 단월 세력이 반신라적 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성여왕을 이어 왕위를 계승한 효공왕은 봉림사에 머물고 있는 심희에게 귀의하여, 그의 도움으로 김해 지역의 호족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399)曺凡煥, 앞의 글, 53∼54쪽. 그리고는 곧 이어 심희는 왕건과 연결되어 918년에 고려 왕실에 나가기도 하였다. 심희의 제자에 景質·融諦·찬유 등이 있다. 그 중 융체는 尙州 公山의 三郞寺에서 禪風을 휘날렸다. 찬유는 진성왕 6년(892)에 중국에 들어가 無學의 제자인 大同 子祥의 법인을 받아, 태조 4년(921)에 귀국하고 왕건의 청으로 혜목산에 거처하였으며, 혜종·정종·광종의 귀의를 받았다. 그의 문하에 昕弘·同光·幸近·訓善·傳印·金鏡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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