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산문 중 가장 늦게 성립된 須彌山門의 개창자는 利嚴이다. 그는 진성왕 10년(896) 중국에 들어가 靑原 行思의 法脈을 이은 雲居의 법인을 받아 효공왕 15년(911)에 귀국하였다. 그는 처음 김해부 지군부사인 김율희의 도움을 받았으나, 뒤에 왕건의 청으로 해주의 廣照寺에 거주하였다. 광조사는 왕건 및 그의 외척 세력인 皇甫氏의 후원으로 성립되었다. 黃州를 근거지로 한 황보씨 세력은 고려 왕실의 先代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광종대에는 외척으로 그 세력을 더욱 넓혀 갔다. 그리하여 이엄의 在家 제자로 皇甫悌恭이 있었고, 그 외에 王儒·李陟良 등 전직과 현직 고관이 있었다.
이엄과 더불어 砥平 菩提寺의 大鏡 麗嚴, 長湍 五龍寺 法鏡 慶猷, 강진 무위사 先覺 逈微 등 4인은 모두 운거의 법인을 받아와 왕건과 연결되고 있어서, 이들을 海東 四無畏士라 불렀다. 이들의 사상 경향은 고려 왕정을 보익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리하여 이엄은 “王者는 四海를 집으로 삼고 萬民을 자식으로 삼아 무고한 무리를 죽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들이 靑原 行思의 법맥인 운거의 법인을 받아온 것은 그들의 사상이 敎禪一致的인 경향을 띠는 것과 연관된다. 그의 제자에 處光과 道忍 등이 있으나 모두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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