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1. 전시과 제도
  • 7) 녹봉제
  • (1) 녹봉제의 성립과정
  • 다. 전시과와 녹봉제의 성립

다. 전시과와 녹봉제의 성립

전시과와 녹봉제의 정비는 관료들에 대한 대우제도가 이원적으로 정비된 것을 의미한다. 고려 전기 토지제도의 중심을 이룬 것은 전시과이며 전시과가 처음으로 정비된 것은 경종 원년(976)이다. 광종 때 역분전을 받은 공신세력이 많이 물러나고, 4색공복의 제정을 비롯하여 새로운 질서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이를 토대로 하여 경종 원년에 始定田柴科가 제정되었다.

경종 원년의 시정전시과는 4색공복제에 따라 4계 8층으로 나누어 응분의 전토와 시지를 지급하는 토지 분급규정이다.021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柴科. 그러나 여기에는 구체적인 관직은 표시되어 있지 않고, 또한 관품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만 인품의 우열에 따라 田·柴를 분급한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관품과 인품을 병용한 급전제였다.0214)姜晋哲,<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135쪽. 급전의 기준을 功役에 두었던 역분전 지급의 초기적인 관례를 탈피하고 관품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채택한 것은, 고려 관료조직의 체계가 점점 자리잡아 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관제 발달면에서 새로운 진전이라 할 수 있다.

경종 원년의 시정전시과가 실시된 이후 성종조에 이르러서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함에 따라 모든 관료가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 지급받게 되는 녹봉은 관제가 정비되기 이전에 지급되었던 녹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고려의 중앙관제는 성종 원년과 2년에 갖추어지기 시작하여 성종 14년에 대폭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성종 15년(996)에 內史令 徐熙에게 致仕祿이 지급되었는데,0215)≪高麗史≫권 94, 列傳 7, 徐熙. 치사록은 70세가 되어 정년 퇴임하는 3품관 이상에게 지급되는 녹봉이다. 이로 보아 녹봉은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서만이 아니라 퇴관 후의 생활보장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서희가 치사록을 받기 이전에 역임했던 내사령직에 대한 녹봉으로 지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성종 이전의 녹읍과 녹봉, 역분전과 예식은 국초의 공역자들에게 특수한 대우 방법으로 지급된 것으로, 고려적인 관제 정비의 바탕 위에 지급된 녹봉제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광종 16년에 내의령 서필에게 녹봉이 지급된 것이 고려적인 녹봉제의 효시라 할 수 있겠지만, 하나의 제도로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성종 14년(995)에 이루어진 관제개편은 그 후 3년이 지난 목종 원년(998)에 개정되어 改定田柴科에 그대로 반영되었다.0216)李基白,<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35쪽. 이 개정전시과는 앞서 경종 원년의 시정전시과와는 달리 전체 전시 수급대상자를 제1과부터 제18과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관직과 위계의 고하를 기준으로 삼았다. 예를 들면 같은 정 3품 가운데서도 6상서는 4과로, 상장군은 5과로 구분되어 같은 품계라도 관직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그러나 품계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성종대의 관제정비 바탕 위에 관품과 관직을 기준으로 한 전시과와 녹봉제가 시행되었을 것으로 믿어지지만 녹봉 지급면에서는 그와 같은 구체적인 예는 찾아 볼 수 없다.

현종 원년(1010)에 거란의 침입을 받아 증가된 군수조달로 백관의 녹봉이 부족하게 되자 京軍의 영업전을 탈취하여 녹봉에 충당함으로써 무관들로부터 자못 불평을 사게 된 일이 발생했다.0217)≪高麗史≫권 94, 列傳 7, 皇甫兪義. 이렇듯 현종대에는 녹봉 급여를 둘러싸고 분쟁이 야기될 정도로 관료들의 녹봉에 대한 요구는 더욱 가중되어 갔다. 현종 15년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죽은 崔沆은 “달 수를 계산하여 녹봉을 청하였다(計月請俸)”고 하였는데,0218)≪高麗史節要≫권 3, 현종 15년 6월. 이로 미루어 보면 최항이 받아야 할 녹액도 당연히 정해져 있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녹액규정은 알 수가 없다. 구체적인 녹액규정에 따라 실시된 녹봉제는 덕종 원년(1032)에 제정된 외관록인 東京官祿에서 비로소 찾아 볼 수 있다.

덕종 원년 7월에 정한 동경관록에는 留守(250석), 判官(130석), 司錄(70석), 掌書記(60석), 法曹(30석) 등 외관에 대한 구체적인 녹봉 액수가 정해져 있다.0219)≪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外官祿. 이 동경관록은 고려 녹봉제의 외관록에 관한 기사로서는 처음 보이는 기록이며, 또한 구체적인 녹액을 규정한 것으로도 최초의 것이다. 이 덕종 원년에 정한 동경관록과 문종 때 정비되었다고 하는 3京 留守官의 녹봉을 비교 고찰해 보기 위해≪高麗史≫백관지·지리지·식화지의 3경에 관한 기록을 종합하여 정리하면<표 1>과 같다.

  留守官
設 置
留守官
祿整備
祿 俸
3品이상 4品이상 6品이상   7品이상 8品이상
西京 成宗
14년
文宗朝 知西京
留守事
270석 副留守 200석 判官 86석
10두
司錄 46석
10두
掌書記 40석 法曹 20석
東京 成宗
6년
德宗
원년
留守 250석     判官 130석 司錄 70석 掌書記 60석 法曹 30석
文宗朝 留守 223석 副留守 66석
10두
判官 86석
10두
司錄 46석
10두
掌書記 40석 法曹 20석
南京 文宗
21년
文宗朝 留 守 200석 副留守 120석 判官 86석
10두
司錄 46석
10두
掌書記 40석 法曹  

<표 1>3京의 留守官 설치와 녹봉(德宗∼文宗)

*東京副留守 66석 10두는 166석 10두의 잘못임.

<표 1>에서 먼저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3경의 유수관 설치 과정에서 태조 이래 보다 중요시하여 왔던 서경이 동경보다 늦게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성종이 서경을 멀리하고 신라 출신인 崔承老를 그의 정치 고문으로 등용하는 등 친신라적인 정책의 결과 때문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0220)河炫綱,<高麗 西京考>(≪歷史學報≫35·36, 1976), 159쪽. 그러나 외관록제 실시에서 동경이 서경보다 40년이나 앞서 실시되고, 또한 중앙관록보다 동경관록이 먼저 정비된 것처럼 기록된≪高麗史≫의 기사는 그것만으로 일단의 의문을 풀 수 없게 한다. 다음으로 덕종 원년에 정한 동경관록과 문종 때 정한 동경관록을 비교해 보면, 그 녹액면에서 상당히 감소 조정되고 있다. 이것은 덕종 원년에 정한 동경관록이 그 후 문종 때 이르러 다시 조정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덕종 원년의 동경관록에서 외관의 구체적인 녹봉이 나타나고 있는데 비하여 중앙 문무반의 녹액규정이 보이지 않는 것은 기록상의 누락임이 분명하다.

외관록인 동경관록이 정해진 시기와 비슷한 덕종 원년 정월에 좌복야 異膺甫와 우복야 金如琢이 각각 司徒와 司空을 加授하여 그 반차를 참지정사 아래 중추원사 위에 있게 하고, 아울러 그에 따른 녹봉도 더 지급하도록 하였다.0221)≪高麗史≫권 5, 世家 5, 덕종 원년 정월. 여기서 ‘並加祿俸’이라 했을 경우 좌·우복야에 대한 구체적인 녹액규정이 정해져 있었음을 전제로 하여 아울러 지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무 반록을 비롯한 녹제 전반에 걸쳐 구체적인 녹액규정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高麗史≫식화지 녹봉조에는 문무 반록을 비롯한 대부분의 녹제가 문종 30년(1076)에 정비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녹봉조의 기록이 잘못이거나 누락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확신시켜 주는 것으로 덕종조를 지나 靖宗 2년(1036) 2월에 백관에게 祿牌를 賜給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0222)≪高麗史節要≫권 4, 정종 2년 2월. 녹패는 녹봉을 받을 수 있는 증서로서 구체적인 녹액이 규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문종 30년은 성종 이래 개편을 보게 된 관제가 정비되고, 경종 원년의 시정전시과 이래 고려의 토지제도로서는 완성을 뜻하는 갱정전시과의 정비 등 고려의 통치조직이 일단 매듭짓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 때를 당하여≪高麗史≫식화지 녹봉조에는 외관록을 제외한 대부분의 녹봉제가 문종 30년에 정비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녹봉은 관료가 국가에 봉사하는 데 대한 급부로서 지급한 것으로 녹봉제의 정비는 곧 관료체제의 완성을 뜻한다. 녹봉제의 정비는 토지제도의 정비와 병행하는 것으로서 녹봉의 재원이 될 토지를 비롯한 조세 수입을 확보할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토지제도로서 완성을 뜻하는 갱정전시과와 녹봉제의 정비가 문종 30년에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정비작업이 각각 단계적으로 추진되어 왔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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