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기 농민교역은 전적으로 장시에만 의존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해안이나 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나 육로가 발달한 교통의 요지에는 선상이나 보부상 등 행상의 왕래가 잦았다. 이들은 장시 사이를 순회하며 그 상권을 연결하는 비교적 전업적인 상인이었다. 행상은 육로를 따라 장사하는 陸商과, 강이나 바다를 따라 배를 이용하여 장사하는 船商의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1388)홍희유, 앞의 책, 79쪽.
朴平植,<朝鮮前期의 行商과 地方交易>(≪東方學志≫77·78·79, 1993), 333쪽.
가) 육상의 상업활동
행상이 상업활동을 할 때 물품이 소량이고 운송거리가 짧으면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다녀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짐이 많고 무거우며 먼 거리를 운반할 때는 수레나 말을 많이 이용하였다. 수레는 도로의 발달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원거리 운송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말이었다. 이런 운송수단에 대해 서긍은, 고려는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여 수레로 운반하기가 어려우므로 가벼운 것은 사람이 지고 가지만, 이것저것 싣는 데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그 방법은 2개의 그릇을 좌우에 장치하여 말등에 걸쳐 놓고 그 안에 물건을 담아 운반한다고 하였다.1389)≪高麗圖經≫권 15, 車馬 雜載.
육상의 행상활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현상은 院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원은 국가 공무 여행자를 비롯하여 일반 여행자와 행상들이 묵는 숙박소였다. 따라서 원은 역참과 역참 사이, 나루터, 고개 아래 등 사람의 통행이 잦은 교통의 요지에 설치되었다.1390)홍희유, 앞의 책, 80쪽. 국가에서 원을 설치한 것은 상인이나 나그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였다. 14세기 말 경주와 울산 사이에 있는 德方里에 설치된 德方院은 어염을 매매하는 상인이나 나그네의 숙박을 위해 설치되었다.1391)權近,≪陽村集≫권 13, 記類, 德方院記. 따라서 원은 상업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설치되었으며 동시에 상업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상인의 편의 보장이나 상업발전과 관련하여 설치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업이 발전함에 따라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은 일부 원의 경우는 그 자체가 상업중심지로 발전하여 가기도 하였다.1392)흥희유, 앞의 책, 80쪽.
원은 사찰이나 승려가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사원이 원거리 교역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의 설치와 운영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사원이 유통구조 상에서 차지하는 기능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원은 더욱 발전하였으며, 사원은 원을 장악함으로써 유통구조상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게 되었다.1393)李炳熙,≪高麗後期 寺院經濟의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 108∼109쪽.
행상은 원칙적으로는 본관에 편제되어 있었다. 현종 5년(1014)에 商旅가 죽었는데 성명과 본관의 기록을 남기지 않은 자는 소재지 관사에서 임시로 매장하되 나이와 용모를 기록하여 잘못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영구 정식으로 삼도록 하였다.1394)≪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5년 6월 경신. 이 규정에 의하면 행상은 본관에 편제되어 있으면서도, 본관지역을 벗어나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생산지가 국한되어 지역사회 안의 분업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교환경제의 경우에는 이들 행상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1395)蔡雄錫, 앞의 글(1988), 106쪽.
육상의 상업활동은 도로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다. 전라도 장수의 六十峴이나 운봉의 八良峴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갯 길이었다. 구례의 潺水津이나 未草栗峴은 구례와 순천을 연결하는 지름길이었다.1396)≪高麗史≫권 57, 志 11, 地理 2, 全羅道 長水·雲峯·求禮縣. 이러한 고갯길이나 지름길은 육상들의 중요한 상업로 기능을 하였다고 보인다.
나) 선상의 상업활동
강이나 바다를 이용하여 상업에 종사하는 선상은 물품의 다량·원거리 수송이 용이하였다는 점에서 육로를 이용하는 육상에 비하면 상업활동의 규모가 훨씬 큰 상인이었다.
12세기 초의 한 기록에 의하면 珍島縣民 漢白 등 8명이 매매차 제주도에 가려다 태풍을 만나 송의 明州에 표류한 적이 있었다.1397)≪高麗史≫권 13, 世家 13, 예종 8년 6월 경술. 매매차 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전업적인 선상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전라도의 선상들은 자기나 미곡을 싣고 제주도에 매매하러 가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선상은 어염·미곡·도자기 등을 판매하는 비교적 규모가 큰 전업적인 상인으로 지방과 지방이나, 지방과 중앙의 상권을 연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보인다. 선장은 직접 매매활동도 하였겠지만, 그 매매과정에는 중간매체로 보부상 등 육상이 존재했을 것이다. 선상의 상업활동은 전라도 지역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1398)金東哲, 앞의 글, 220∼221쪽.
선상의 상업활동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은 莞島 해저유물이다. 1983년 12월 19일∼30일과 1984년 3월 15일∼5월 23일 2차에 걸쳐 발굴된 莞島 漁頭里 해저유물조사에서는 선체를 비롯하여 靑磁 30,645점, 雜釉 26점을 비롯하여 토제유물 2점, 철제유물 18점, 목제유물 9점, 석제유물 1점 등 총 30,701점이 인양되었다. 유물은 대체로 11세기인 고려 초기의 유물로서 대부분 청자였다. 이들 유물은 한 배에 실려서 가다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것으로서, 대부분 상품으로서 제작 운반되던 것이었다. 청자의 대부분은 대접과 접시로서 일상생활품으로 제작 판매된 것이었다. 당시 반상기의 대종은 대접과 접시이며, 식기는 대형 대접과 소형 대접 각 3점과 납작한 접시 2점 그리고 口緣이 직립된 조금 오목한 접시 1점이 한 벌을 이룬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목선은 분명히 우리 나라 목선으로서 연안 운항용의 소목전이었다.1399)文化財管理局,≪莞島海底遺物≫(1985).
고려시기의 선상은 완도 해저유물에서 인양된 것과 같은 소형 목선에 상품을 싣고 연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배 한 척에서 3만여 점의 도자기가 인양되었다는 것은 당시 선상의 상업활동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선상의 상업활동의 하나는 조운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고려시기의 대표적인 수상 교통로인 강이나1400)吉田光男,<高麗時代の水運機構「江」について>(≪社會經濟史學≫46-4, 1980). 포구를 중심으로 발달한 漕運은 가장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운송체계였다.1401)北村秀人,<高麗時代の漕倉制について>(≪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979). 따라서 이러한 조운망을 중심으로 지방의 유통기구가 형성되고 있었다.1402)남원우, 앞의 글, 83쪽.
이러한 선상들의 상업활동은 강가나 바닷가를 중심으로 지방 장시를 발전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1403)金三顯,<고려후기 場市에 관한 연구>(≪明知史論≫4, 1992), 83∼85쪽. 국가는 각 도의 關防이나 주요한 하천의 津頭 등 교통요충지에서 상인들의 통과세로서 商稅를 징수하였다.1404)白南雲, 앞의 책, 436쪽. 내륙 및 연해의 수로를 통한 선상의 활약과 상업적 분위기는 한강을 비롯한 다른 주요 수로에서도 전개되었으며, 무신집권기 이후 더욱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1405)徐聖鎬,<高麗 武臣執權期 商工業의 전개>(≪國史館論叢≫37, 1992), 99쪽.
고려 전기의 상품유통의 발달에 따라 도량형도 일정하게 발전하였다. 국가에서는 상품유통의 확대·발전과정을 체제 내로 흡수하기 위하여 도량형을 정비하였다. 정종 6년(1040) 2월에는 자·말·저울의 규격을 제정하였고, 문종 7년(1053)에는 서로 다른 물건을 재는 말의 규격을 각각 다르게 제정하였다. 도량형의 정비는 상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보다 쉽게 하고 조세 등 현물 수탈을 강화하려는 목적과 관련된 것이지만, 동시에 상품유통의 발전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다.1406)채태형,<10∼12세기의 국내상업과 대외무역 및 화폐유통의 발전>(≪력사과학론문집≫13, 1988), 219∼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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